케냐 아이들, 케냐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상상력에 관한 것이었다.
계획을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으로 리허설을 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리허설 과정 속에는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나게 될 일을 예측해 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앞으로 하게 될 일을 준비하면서 이미 겪어보았던 좋았던 점이나 방해가 되었던 점 또는 미숙했던 점들을 머릿속으로 재현해 보고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혹은 잘못을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과정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에도 포함되는 그 상상력.
시각 아트 활동을 할 때, 아이들은 비워두고 색칠하기를 어려워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제법 큰 아이들이 그랬다.
마사이마라와 레이크나쿠루 여행을 갈 때 느꼈던 당황감과 색깔이 같았다.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두 사람은 정확한 투어 금액을 제시하지 못했다. 심지어 입장료를 잘못 산정했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170달러를 달라고 해서 200달러를 준 다음이었고, 입장료는 세 사람 100달러였는데도 말이다.
레이크 나쿠루 때도 다르지 않았다. 두 명의 가족을 추가로 동행시키며 내게 어떻게 해 달라는 말도, 투어 비용을 더 달라는 말도 안 하고...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도 안 하고... 불쑥불쑥 천 실링 있냐, 자고 갈 거냐 물었다.
계획... 그런 거 해 봐야 날씨가 돕지 않고 정치적인 또는 환경적인 여러 면이 돕지 않기에 의미를 두지 못하기는 할 것 같다.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돌아가야 하는 일이 허다하고, 공사 때문에 수돗물이 끊겨서 언제 복구될지 기약이 없고, 비가 오다가 우박이 내리다가 날씨는 그렇고, 시장에 나오는 물건들이 그때그때 달라서 메뉴를 정해 음식을 준비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사람이 갑자기 살해당하거나 사고가 나기도 하는 등 무엇 하나 뜻대로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어려운 버라이어티 한 상황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근데 내가 당황스러운 건 그런 일이 생길 때 이 사람들이 해결 방법을 찾기보다 멈춰서 버린다는 거다.
비어있는 부분이 비워내야 할 부분인지 채워야 할 부분인지에 대해 가장 기초적인 판단을 미루고 누군가 좀 더 힘 있는 사람의 판단과 지도가 있기 전까지는 문제에 대한 보고도 없이 그냥 멈춰있다는 거다.
에티오피아 항공이 홍콩 태풍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태풍, 또는 다른 문제로 인한 항공 결항이나 지연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간혹 해야 할 일을 잘해 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비어있는 부분에 대한 인식은 없어 보였다.
다른 항공사들은 태풍 예상 경로와 시간 계산을 끝내고 다음 비행 스케줄을 잡고 있는데
여기는 오후가 되어야 한다고 내 티켓은 아예 차단시켜 버렸다. 그 와중에 내 마지막 항공편인 홍콩에서 인천 비행 스케줄이 메일로 들어왔다. 당연히 이 친구들이 내게 준 비행 스케줄과 다르다. 이들이 준 -티켓 발권을 안 해주고 있는- 스케줄은 내일 여섯 시 홍콩 도착. 심지어 아디스아바바에는 어제저녁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난 아직도 여기. 아시아나 홍콩 출발은 세시 이십 분이라고 연락이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도 듣지 않은 채 오후가 되어야 한다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일요일도 마찬가지.
공항 항공사 사무실 담당이 어찌나 불친절하게 밀어내는지... 홍콩 공항 캔슬은 오늘 중 안 풀린다고...
그래서 다른 여정으로 표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컴퓨터를 뒤적거리다가 홍콩 공항 인천행 발권이 왜 되어있느냐며 나한테 따지는 것이었다. 너희들 주관 업무 아니냐 했더니 월요일 시내에 있는 티켓 오피스에 가서 해결하라며 또 창구를 닫아버렸다.
월요일 티켓 오피스에 갔더니 홍콩 공항 출발 편 노쇼페널티를 내가 내야 한단다
왜 내가 페널티를 내야 하는지 의아한 켄은 화를 내고...
나는 싸우기 싫다고, 알았으니 표를 달라고... 우여곡절...
그런데 이번엔 한국 아시아나 사무실이 문 닫은 시간이라 내일 아침 다시 와서 해결해야 한다고 해서...
아침 여덟 시에 다시 방문하기로 켄군이 시간을 정해 약속했는데...
우리의 정의남 켄군의 시간도 아프리칸 타임인지라...
너 바쁘면 나 혼자 갔다 올 거라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거의 다 왔다는 문자가 삼십 분 전에 왔었지만...
아홉 시 삼십 분을 지나고 열 시가 넘도록 나는 여전히 집안에 있었다.
시간은 그냥 정처 없이 길어질 게 뻔한데
이런 일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어차피 자기들이 책임져야 할 일인데
일은 그냥 아프리카 스타일로 꼬여가고 있었다.
상상력은 자신감과 동행한다.
굳이 없는 일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일을 미리 파악해서 기초적인 대처를 하는, 자신 있게 선한 의지를 펼칠 수 있는 리더십이
각자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것 하나도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지런히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나름의 열심으로 분주한 켄을 보면서, 시내에 있는 항공사의 티켓 오피스 담당자를 보면서, 순하고 착하기만 한 이 사람들을 어쩐지 그냥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정리가 되어갔다.
이런 평화로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내 세계의 바쁜 시간 속으로 끌어들여와 붙잡아 흔들고 다시 세워지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내 분주한 머릿속의 의문사항들을 풀어달라고 요구 할 수 없이 그저 일이 풀어져가는 과정을 보고 있기만 하는 일주일이 차곡차곡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