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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모리의 마지막 날

그리고 나이로비 공항 노숙 도전하기

by 미 지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나오던 날 현관문을 잡고 "양금~ 양금~" 소리 지르며 울던 인형같이 귀여운 따샤. 그제야 아침마다 내 방 앞에서 재잘거리던 '양금'이 나를 부르던 소리였다는 걸 알았다. 엄마도 가고, 함께 지내며 놀아주던 샤샤도 네리샤도 마리온도 학교에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학교 일로 바쁘고...


아이를 안고 집 앞의 가게에 가서 비스킷 여러 개를 샀다. 증조할머니, 도우미 언니와 과자를 나누어 먹는 중에 윌리의 차가 도착했다.


덩그러니 큰 집에 할머니와 아기와 도우미언니 셋만 남겨놓고 털털거리는 윌리의 차를 타고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수돗물이 두 주째 끊겨 안 나오고, 주유소에는 기름이 없는 곳이 허다하고, 전기마저 끊어져 랜턴 불빛에 의지해 밥을 먹고 아이들 숙제를 도와주는 가정의 풍경. 선물을 준비해 주고 노래를 불러주던 전날 밤 송별식의 그 따뜻함에 눈물이 나올 뻔했던 기억들을 뒤로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보멧카운티의 버스터미널에서 마타투라고 불리우는 승합차를 타고 나이로비로 출발했다. 나이로비로 가는 길, 여기저기 하늘과 땅과 빛들이 무심하게 만나서 마음 내키는 곳에 무지개를 내려놓았다. 쌍무지개 같은 것도 어렵지 않게 그려내다 사라지곤 하는 길을 달려가는 길. 차창 밖 스쳐가는 땅을 가리키며 저 땅들이 점점 갈라지고 있다고 켄은 설명했다.


2018년 3월의 홍수로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주변 도로가 갈라지는 일이 생겼는데 이 현상은 앞으로 오랜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분열시키는 지질학적 현상일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었던 듯하다.


기상이변은 케냐, 더 나아가 아프리카에도 예상 못했던 환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흘 전, 대낮이었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커다란 빗소리가 들렸다. 천둥 번개가 치는 폭우가 내리는가 했는데, 흰색 덩어리가 하염없이 내리면서 여기저기 부딪히는 소리였다. 켄의 아내 페니나가 '레인스톰'이라며 얼음덩어리를 가지고 들어와서 보여주었다. 40분 정도 끊임없이 내리는 우박 덩어리에 함석지붕이 제일 큰 소리를 냈다. 눈처럼 새하얗게 쌓인 우박의 스케일이 엄청났다. 이런 커다란 우박 덩어리 때문에 초원에 풀어놓은 어린 송아지나 강아지들이 죽기도 한다고 했다.

켄은, 아내 페니나의 생일에 하늘이 축하 케이크 가루를 뿌려준 것이라고 자랑을 했다.


켄은 나에게 첫날 점심식사를 했던 미리카의 집에서 묵을지 아니면 호텔에서 묵을지 물었고, 나는 그에게 나이로비의 호텔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며 내일 점심때 한국식당에서 밥을 사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호텔 주변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혼자서 밖으로 나올 때 혹시 길을 잃게 될지도 몰라서 호텔 주변의 상가 건물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출입게이트를 기억하고 사진을 찍고 켄과 연락이 가능하도록 인터넷 연결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 버스터미널 부근의 번잡한 거리를 혼자서 걷는 일을 마치고 철컹거리는 낡은 철문이 열리는 호텔의 내 방을 찾아 들어갔을 때 마사이마라의 사파리 탐험 때처럼 설레었고 뿌듯했고 성취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다음날, 우버를 타고 나이로비 주택가의 한인식당에 가서 불고기 식사를 한 뒤, 공항으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 항공사의 문자가 불친절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홍콩 공항이 태풍으로 폐쇄되어 오늘 출발 예정이던 항공기가 취소되었으니 항공사에 문의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토요일 오후였고, 문자를 보낸 항공사와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당황스러워하는 켄에게 내 에티오피아 항공편은 한국의 아시아나와 연계된 티켓이므로 아마 아시아나항공에서 다시 비행 스케줄을 보내 주게 될 것이니 공항에 가서 알아보겠다고 했다.

짐을 챙겨 들고 우버를 타고 약간 고집스럽게 공항으로 향한 이유는 며칠 전부터 가족의 생계비가 부족하다며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켄이 살짝 피곤해진 탓이었다.

취소된 항공 스케줄도 공항에 가면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도 있었고.


공항에 내려서 남은 케냐 실링을 모두 다 켄에게 주고 출국장에 들어갔다.


발권을 하려는데 티켓팅 불가. 티켓이 오픈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냥. 기약 없이.


하룻밤 지내면 해결해 주려니 하는 낭만적인 기대로 공항 대합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공항 노숙. 한번 해 보지 뭐.



아프리카와 이별할 시간은 아직 아니었다.

공항 노숙으로 하룻밤을 지낸 일요일.

나이로비 시내에 있는 티켓 오피스에 가서 표를 알아오라는 에티오피아 항공사 직원의 불친절함에 상처받은 나는 혼자 공항 근처 호텔을 찾아보다가 포기하고 다시 켄에게 연락을 했다.


고마운 젊은이였다. 켄은.

그저 근처 호텔 정도만 알아봐 주길 바랐는데 연락을 하고 몇 시간이 되지 않아서 홈스테이 숙소를 섭외하고 심지어 그 집주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케냐 시골마을과 완전히 비교되는 나이로비 부촌에서의 한 주가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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