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시나물 Jul 02. 2022

결국 또 헤어질 테니

세상에는 언제나 마음 같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다고  적이 있다. 그리고 개중에 가끔은  세계를 파괴할 정도의 시름을 지니고 있다. 유독 잔혹한 사실은,  일들은 받아들일 채비를  겨를도 주지 않고서 불현듯 찾아온다는 것이다. 세상의 비수가 꽂혀 터져 나온 검붉은 피의 웅덩이는 도저히 마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위에 눈물을 덧대다 보면 묽어지기야  테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을 목전에 두었던, 가짜 스물의 겨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셨던 할아버지는 입원을 하셨고, 백수의 신분이자 당신 사랑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말벗을 자처하여 꾸준히 병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 시간에는 숟가락을 금방 내려놓는 당신의 팔을 부여잡아 한 톨이라도 더 몸에 들어가게 했고, 해가 지고 나면 당신의 힘겨운 숨소리를 들으며 어딘가에는 있다고 하는 신을 찾았다. 그때 그렇게 간절히 신을 추종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구원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방에서 온기가 지워질 때 즈음, 당신은 저마다의 티비 소리가 간지럽게 퍼지던 그 다인용 병실에서 소름 돋게 안락한 독실로 방을 옮겼다. 마침 육지에서 일을 하시는 고모까지 내려온 걸 보니, 편안한 소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런 눈치 없이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썩 괜찮았다. 6층에 있던 그 방은 북쪽으로 창이 열려 있어 하늘이 탁 트여 잘 보였다. 비록 먹구름만 겹겹이 쌓여 색감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하늘이 보이니 나는 만족했다. 곧 비가 쏟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미리 우울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임무를 분담해 줄 고모도 내려왔겠다, 술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다. 술맛을 일찍이 알았다기보다는 어른의 흉내를 내고 싶었다. 무언가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울 때 찾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이 부푼 마음으로 고등학교 친구 몇과 가까운 곳에 약속을 만들고서 누워 있는 당신의 얼굴을 살며시 보았더니, 인간말종의 직무유기를 하는 듯해 죄책감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 쓸데없는 감은 오늘은 꼭 마셔야겠다고 위로를 받아야 할 때라고 자꾸만 일렀고, 나는 나름의 타협점으로 당신이 좋아하시던 잔치국수를 사고 와 노란 양은 냄비에 옮겨 담은 뒤 잠깐 놀다 온다는 말만을 남기며 병원을 나섰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대접한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몰두하기 충분했다. 부대찌개와 소주를 시킨 다음, 그동안의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마시고, 친구들의 여러 고민을 듣다가 마시고, 조용히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마시고. 일정한 주기에 의무적으로 마시다 보니 소주병은 어느덧 숲을 이루었고, 우리 모두는 내일이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발로 지면을 밀자, 몸은 도끼가 박힌 통나무처럼 줏대 없이 흔들렸고, 서글픔은 나이테를 따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맴돌았다.

가게를 나와서도 십분 더 떠들다가 서로 힘내라는 말과 함께 안녕을 고하고서는 택시를 탔다. 창밖에는 가로등들이 빛을 번지며 차례로 쓰러지고 있었는데, 이유 모를 싸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니 취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서 베개에 머리를 묻고 곧장 잠을 청했다. 분명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있는데, 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한 그 기분은 섬뜩하면서 울렁거렸고 호흡을 길게 몇 번 내뱉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병원을 나설 때부터 알게 모르게 느껴졌던 일련의 감정들은 사건의 예고였을까. 그래, 모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했었지. 그날 아침이 오기 전에 내가 사랑하던 한 세계는 역사가 되었다.   

그래도 간신히 마지막은 지킬 수 있었다. 그 새벽에 아버지께서 고모의 전화를 받으신 덕분이었다. 비록 병원에서 나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펑펑 울었지만, 당신은 그래도 웃고 계셨으며 내게 괜찮다고 속삭여주셨다.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병풍을 두른 채 비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백색 가운의 사내가 죽음을 알리는 몇 마디를 남기기 전까지. 장례는 잔인하게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대수가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서도 며칠 눈물샘을 잠그지 못했다. 당신 곁을 떠나 잠을 잤던, 딱 하루였다. 그 하루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 다만 운이 안 좋았을 뿐이었다. 세상에 안겨져 있지 못했던 탓일 뿐이었다. 하지만 늘 머리와 가슴은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르듯, 꽤 오래 죄를 앓았다.


처음 겪어본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처럼 꽤나 서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별에 능숙해질 필요가 있을 테다. 늘 죽음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언제든지 나를 떠나버릴 것들을 마지막까지 양껏 사랑하며, 그 순간에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줄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챙겨야 한다. 혹자의 말마따나 영원한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으니, 순간을 잔뜩 아껴야 한다. 그렇게 숱하게 찾아올 헤어짐을 단순한 감기처럼 대하려 해 보자. ‘약 먹으면 금방 낫겠지’ 하며 아파하면서도 오래 끌지는 말자.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다며 헤벌쭉 사람들을 쫓아다니던 낭만파 꼬맹이가 이별 전문가를 꿈꾸기 시작하다니.

그런 날도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