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에나 빌런은 있다. 어쩌면 회사 생활은 오피스 빌런과의 전쟁으로 요약되는지도 모른다. 빌런이 비슷한 직급이면 그나마 낫다. 그냥 없는 사람이라 치고 내가 더 일하면 된다. 하지만 빌런이 관리자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미 결론을 다 내려놓고 입으로만 소통을 강조하는 '답정너'부터 평소엔 농땡이만 치다가 임원보고만 들어가면 저 혼자 일을 다 한 것처럼 어필하는 얌체족, 주말이고 명절이고 시도 때도 없이 메신저를 보내는 메신저 감옥의 간수까지, 그 유형은 가지각색이다.
내가 만났던 최악이자 최강의 빌런은 가스라이팅형 관리자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정상적인 이미지를 유지한다. 아니, 오히려 어떤 직원들은 너무 좋으신 분이라며 같이 일하는 게 부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한 하루를 돌아보면 묘하게 개운하지 않다. 열심히 일했는데 왠지 남는 게 없는 기분이다.
가스라이팅형 관리자는 특유의 친근함을 무기로 개인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능통하다. 둘이 있을 때 은근한 목소리로 “내가 믿는 건 고라니 대리밖에 없는 거 알지?”라며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 뒤에 따라오는 건 더 많은 일이다. 헉헉대며 결과물을 가져가면 “역시 너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찡긋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업무를 준다.
물론 여기까지만 봐선 저 사람이 정말 빌런인지, 아니면 여느 보통의 관리자들처럼 욕심이 많을 뿐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부채의식 심기” 스킬을 시전할 때다.
"내가 너 승진 생각해서 상무님한테 얼마나 실드 쳤는지 알아?", "나중에 잘되면 내 덕인 줄 알아라."라는 멘트를 반복하며 본인이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암시를 건다. 내가 작은 실수라도 할 때면 크게 부풀린 다음 대인배처럼 넘어간다는 식으로 죄의식을 심는다. 그 결과는 신비롭다. 관리자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야근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결정타는 인사평가다. 가스라이팅이었든 아니었든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면 괜찮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관리자들은 정당한 평가를 하는 대신 가스라이팅으로 불만을 무마하려고 한다. 이번엔 김 과장이 승진대상이어서 어쩔 수 없이 고과를 몰아줬지만, 내년엔 꼭 챙겨주겠다며 말이다. 하지만 다음 해에 본인이나 내가 다른 부서로 발령 나면 그걸로 끝이다. 책임감이 강하고 일을 잘 하려는 사람일수록 이런 유형의 빌런에게 취약하다.
내가 찾은 대응법은 거리두기다. 일을 완벽하게 해내서 만족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그들에게 만족이란 없다. 더 많이 이용당할 뿐이다. 착한 직원 코스프레는 멈추고, 과한 업무지시는 과하다는 표현을 하니 회사생활이 한결 나아졌다. 무작정 드러누운 건 아니다. A를 하고 있는데 추가로 B를 시키면 묵묵하게 야근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말하는 거다. “B를 하려면 A 업무는 뒤로 밀립니다. 어떤 거부터 처리할까요?”
주변 동료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효과적이었다. 가스라이팅이 힘든 이유는 내가 정말 저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지,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혼란스러운 데에 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진단해줄 수 있는 동기나 회사 밖 친구들에게 지금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가스라이팅이 맞는지 확인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피드백을 받든 메타인지를 높이는 데 도움된다.
회사에서 상사를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를 지키는 방법은 찾을 수 있다. 어떤 빌런을 만나든 퇴치법은 있다. 그렇게 하나둘 공략법을 찾다 보면 언젠가 회사 생활이 조금 편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도 메타인지를 유지하는 건 중요할 것 같다. 나 역시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