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세우기의 역사는 길다. 그 시작은 대학이었다. 촘촘하게 위계화된 대학서열은 기나긴 학창시절 자연스레 체화됐다. 그리고 스무 살 겨울, 우린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의 계급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승자와 패자가 뚜렷하게 나뉜 건 아니었다. 서울대를 붙은 친구를 시작으로 조금 덜 진 친구, 조금 더 진 친구 이런 식으로 헤쳐 모여를 했다. 맨 앞줄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승자의 뒤통수가 얼핏 보이는 줄에 선 걸 위안으로 여겼다.
그다음은 취업이었다. 어쩜 세상은 이리도 한결같은지.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는 전문직 금융공기업 대기업으로 치환됐다. 난 또다시 뒷줄에 서지 않기 위한 경쟁을 이어갔다. 적성이나 조직문화보다는 간판이 먼저였다.
취업 다음에 참가한 레이스는 모두 예상하리라 생각된다. 서울대와 전문직의 자리는 '강남'이 대체했다. '강남3구' '마용성'이라는 새로운 계급표는 가정을 꾸린 성인이라면 당연히 암기해야 할 기본 소양으로 구전됐다.
호갱노노에서 내가 나고 자란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아파트를 검색한 적이 있다.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던 공간은 '지금 3명이 보는 중'이라는 글자에 가려 있었다. 입지도 상품성도 특출난 게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린 줄 세우기 좋아하는 세상을 산다. 생애 단계별로 추앙되는 상징자본을 하나라도 움켜쥐기 위해 헐떡인다. 초연해지는 것보다 따르는 게 더 쉬운 세상이니, 나 역시 늘 레이스에 참가했고 그 과실을 누린 적도 있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아이도 같은 세상을 살게 될까 두려워서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이에게 그 세상을 강요할까 봐 무섭다. 세상을 보는 시선도 세습되기 마련이다.
이번 학기엔 어떤 과목이 가장 재밌는지, 또라이 팀장은 언제 다른 부서로 가는지, 자취를 시작한 집 근처에 맛집은 있는지 물어보는 대신, 내 아이의 계급적 위치를 판단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도 모르는 새 말이다.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초연하라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나도 못 하는 걸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하고 싶진 않다. 그냥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그리고 네가 어떤 자리에 있든, 널 믿는다는 믿음을 주고 싶다.
스카이 전문직 강남3구 다음 차례가 '내 자식의 스카이 입학'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