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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Aug 08. 2024

01 이것도 필라테스다!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 (1)

      

    아~ 이 나이에 숙제라니. 숙제한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감자를 태워먹으니 이 천지분간 못하는 입을 '쪼매'버리고 싶다.


    몇 주 전이었다. 아들이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빌려다 달라고 했다. 네네~~ 고3 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가져다 바쳐야지요, 하는 심정으로 그러마고 했다. 도서관에 들렀다 구미 당기는 공고를 봤다. 5주 동안 필라테스 수업을 한다는. 나의 꿈은 온몸에 잔근육이 자글자글한 할망이 되는 것이다. 운동은 하기 싫지만 그런 꿈을 품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수업을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 운동이 생각보다 재미있네?’, ‘운동을 계속 좀 해 볼까?’, ‘하다 보니까 되는구먼.’  5주 동안 내 꿈과 현재 상태의 큰 괴리가 조금씩 메워지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가족들에게 운동 수업을 다녀야겠으니 5주 동안 화요일마다 자기 저녁밥은 각자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선언을 했다. 평소 같으면 저녁 차리고 저녁 먹이고 설거지할 시간에 외출하다니. 으하하~그것도 고상하게 도서관에서 하는 클래스에 가다니. 이런 생각을 하니 더 흐뭇해졌다.


   정작 필라테스 클래스 신청일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신청을 못했다. 늘 사 먹는 돼지고기를 주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입맛 예민한 남편을 닮은 아이들은 돼지고기가 이 집 고기인지 아닌지 알아차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집은 몇 주에 한 번만 도축을 하는데 조금만 늦게 들어가도 금방 품절이다. 핸드폰 알람설정을 해놓고 기다리다가 미친 듯이 클릭을 해서 얼른 사야 한다. 그날도 광클릭에 성공해서 꽤 많은 돼지고기를 주문해 놓고 성취감에 취해있었다. 이번 고기가 도착하면 무슨 요리부터 해서 냉장고를 채워둬야 하나 요리 동영상도 몇 개 봤다. 뒤늦게 필라테스 수업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인원이 채워져 마감된 뒤였다.ㅠㅠ 아~ 내 의식은 근육이 자글자글한 할망이 되고 싶지만 내 무의식은 운동하기 싫은 것일까. 이 중차대한 날에 고작 돼지고기에 정신이 팔려 수강 기회를 놓치다니.ㅠㅠ


   더 싫은 것은 5주 동안 저녁마다 외출하겠다고 한 내 선언을 거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 나는 나가고 싶다.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중요한 할 일이 있어서 나가고 싶다. 수강신청 페이지에 보니 마감된 필라테스 바로 아래칸에 글쓰기 강좌가 보인다. 일단 신청부터 했다. 저녁시간에 놀러 나가고 싶었던 나는 그 수업이 무엇이든 신청했을 것이다.


   첫 주 수업 시간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사람구경이 재미있었나 보다. 강의실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강사는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오랫동안 하다가 최근에 퇴임한 교수였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수강자는 나를 포함해서 6명이었다. 독서 클럽을 두 개나 하고 있는 이, 자기소개서를 잘 쓰고 싶은 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에 온 지 12년이 넘은 공학도, 휴직 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글쓰기라는 것을 깨닫고 블로그 활동을 시작한 이, 의사소통을 더 잘하고 싶은 유치원 교사. 모두 진지하게 수강신청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나처럼 놀러 나온 것 같지가 않다.

  강의 중에 교수가 물었다.

 “글쓰기가 왜 어렵지요?”

  유치원 교사라는 이가 답했다.

 “내가 표현하려고 했던 내용을 상대방도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어요.”

  그의 대답을 들으니 머릿속에 재미있는 상상이 막 된다. 유치원 교사분이 글을 쓰면 내가 상대방 역할을 해 주고 싶다. 나는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들린다. 당신이 그런 의도로 표현하게 맞냐. 또 그 역할을 바꿔서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여기 모인 7개의 인생이 다채로우니 다채롭게 상대방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딴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교수의 강의는 계속 진행되었으므로 나는 강의 내용을 많이 놓쳤다. 강의만 듣기에는 내 집중력이 좀 짧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모처럼 얻은 외출시간을 재미있게 만들고 싶던 나는 사고를 쳤다.  클래스에 공개적으로 제안을 한 것이다.

 “우리 서로 잘 모르고 5주 뒤면 헤어질 사람들이잖아요. 독자 역할을 해주기에 아주 적합한 상황인 것 같아요. 5주 동안 모이면 교수님이 주시는 글감으로 짧은 글을 써서 어떻게 읽히는지 서로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그 뒤의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수강자 중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니 교수님이 A4 2~3장 정도의 글을 미리 작성해오라는 숙제를 내준 것이다. 2시간만 즐거우면 됐지 숙제라니! 그것도 A4 2~3장이라니! 모였을 때 2 문단 정도의 짧은 글을 쓴 후 서로 읽어보는 것 정도를 제안했던 나는 A4 2장짜리 숙제가 확정되자 땀이 삐질삐질 났다. 숙제 분량이 괜찮냐고 급우들에게 물으니 다들 대답이 없다. 젠장~ 이 사람들 평소에 A4 2장 정도는 가뿐하게 쓰는 사람들인가 보다. 교수가 에세이는 A4 2장 정도는 써야 어떤 의미가 완결된다고 전문가스럽게 말해서 내 의심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숙제에 대한 압박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매일 일기를 쓰기는 하지만 이 숙제는 일기와는 차원이 다른 글일 테다. 분량도 그렇고 남들이 읽을만해야 한다는 점도 그렇고.



  예상에 없던 숙제를 받아 들고 집에 돌아와서부터 ‘뭘 쓰지?’로 마음이 답답하다. 뭘 써야 글쓰기 클래스라는 낯선 독자들에게 읽힐 A4 2~3장 분량의 숙제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오늘 어떤 반찬을 만들었는지? 그런 시시한 얘기를 써도 될까? 어떤 여자랑 박 터지게 싸운 이야기? 내 명예를 그렇게 공개적으로 실추시킬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들의 연애 이야기? 아들에게 써도 되냐고 물어보고 써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이 복잡해지자 첫 수업 때 글을 쓰자고 말한 내 입이 원망스럽다. 뭘 써야 할지부터 턱 막혀서 다음 주 화요일까지 숙제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전에서 잘 안 되니 이론을 뒤적일 마음이 생긴다. 첫 시간에 강의내용을 메모한 것을 들춰본다. 설렁설렁 듣는 와중에도 교수가 첫 강의 때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은 이것이다. ‘수필의 장점이자 단점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것!’ 교수 말대로라면 내 마음이 바뀐 일이면 수필의 글감이 된다는 말이다. 그 말을 지금 상황에 적용해 보자면 내 마음을 바꿔야 글쓰기 숙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바꿀 일이 뭐가 있을까. 지금의 나는 일단 숙제를 하려면 이 글쓰기 숙제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부터 바꿔야 한다. 젠장~ 일이 엄청 꼬였어,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글쓰기 숙제가 내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마음을 바꿔야 한다.  


   일단 잘 생각해 보니 좋은 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글쓰기 숙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감각의 그물망이 촘촘해진다고 해야 할까? 내가 무엇으로 글을 쓰게 될지 모르니까 일상의 온갖 것들에 안테나를 세운다. ‘오늘의 뉴스’라는 글을 쓸까 했을 때는 아침 식탁에서 뉴스를 가지고 무심히 오가는 가족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주부의 일상’이라는 글을 쓰려고 했을 때는 식재료나 집안 물건이나 화분 속 식물 같은 것을 꼼꼼히 더 살핀다. ‘저 죽일 놈의 새’라는 글을 쓰고 싶었을 때는 새소리의 고저나 길이까지 유심히 듣는다. ‘나의 꿈’이라는 글을 쓰려고 했을 때는 내 마음속을 찬찬히 더 들여다본다. 똑같은 일상인데 더 밀도 높게 산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글쓰기는 감각의 필라테스일지도 모르겠다.


  한 주부가 수강신청을 잘못해서 글쓰기 강좌에 들어가게 됐다,라고 시작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시작해 본다. 투덜거리며 글쓰기 숙제를 하던 그 여자는 점점 감각의 근육이 자글자글해진다. 자기도 모르게 글쓰기 근육도 자글자글해진다. 그래서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서 자신의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글은 쉽고 재미있어서 독자들이 좋아한다. 어느 날 블로그 친구가 출판사에서 하는 공모전이 있다고 알려준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1등을 해서 200만 원을 탄다. 아픈 이후로 남편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받아 쓰던 여자는 자신이 글을 써서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시상식에 같이 온 남편에게 봉투를 내밀며 말한다. ‘여보, 이거 내가 글 써서 번 돈이야. 당신 좋은 구두 하나 사 신어. 내가 오래전부터 하나 사 주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너무 감동스러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정신 차려보니 글쓰기 숙제를 해야 한다. 휴~. 일단은 써 보자. 지금 나는 감각의 필라테스 중이다.




from 51세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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