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줄을 과신하지 마라

by 이영범

혈연, 지연, 학연, 선거 때만 나오는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는 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인지상정,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완전히 거역하고 살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유럽 국가들이나 미국도 줄의 영향을 전혀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보면 출마자의 고향이나 출신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표를 많이 받는 걸 보면 그들 역시 관계라는 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장 내에서도 줄의 영향은 대단하다. 하지만 사원이나 대리급에서는 줄이 잘 안 보일 것이다. 아직은 팀 내에서 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줄을 보고자 해도 줄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과장급 정도가 되면 달라진다. 일단 자신의 눈에 직장 내의 줄이 보이기 시작하고, 남들 모르게 속마음으로 그 각각의 줄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조심스럽게 하기도 한다. 과장 정도 위치가 되면 느끼는 것이다. 능력보다는 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느 기업체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영업에서 실패한 직원은 용서할 수 있어도 프로토콜에 실패한 직원은 용서할 수 없다.” 즉, 프로토콜만 잘 하면 일을 잘 못해도 진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프로토콜에 실패하면 일을 아무리 잘해도 진급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어? 좋은 말이 졸지에 끔찍한 말로 변해버렸다!


직장 내에서 잘나가는 A부장은 나름대로 자신이 잘 나가는 이유가 있었다. 과장 때부터 팀장을 극진히 모셨기에 팀장이 자신을 신임해 준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자신이 극진히 모셨던 팀장이 승승장구하여 본부장이 된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자신을 돌보지 않고 팀장을 먼저 생각하고 극진히 보좌했던 것이 주효했던지 팀장은 자신을 높게 평가해서 승진할 때 마다 A부장을 같이 데리고 올라갔던 것이다. 사내에서는 직원들이 ‘A부장은 본부장의 왼팔’이라는 얘기를 소곤소곤 속삭일 때 자신은 못 들은 척 하면서도 어느새 어깨가 우쭐해지곤 했다. 본부장이 사내에서 입지가 확고하여 언젠가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이제 A부장의 직장 생활은 문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다는 말이 맞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렇게 믿고 따르던 본부장이 한순간 낙마할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높은 자리는 업무 역량과 상관없이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더니, 본부장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업무 성과는 좋은데 정치적 논리에 휘말려 자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본부장이 낙마하니 그의 왼팔이었던 A부장에 대한 평 역시 안 좋을 수밖에 없었고, 윗선에서는 암암리에 A부장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았으니 A부장은 이제 진급은 고사하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직원들의 뒷 담화를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내기는 했지만 A부장은 자신이 그만두게 되리라는 생각은 단 일 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6개월을 방황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도, 본부장이라는 굵은 줄이 앞에 있을 때는 그렇게 친절했던 사람들이 그 줄이 사라지니 A부장을 만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고, 만나더라도 빨리 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후회가 되었다. ‘좀 더 버티면서 살 길을 모색하고 나오는 건데 너무 일찍 사표를 던졌다’는 후회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왜 내 앞에 있는 줄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후회는 그래도 견딜 만 했는데, 두 번째 후회는 정말 뼈저리게 후회가 되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달도 차면 기운다는 그 진리를 왜 몰랐을까? 그는 눈 앞의 줄을 너무 믿었던 것이다.


일 년 정도 방황한 끝에 A부장은 새로운 마음으로,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한 때 줄 앞에 서있었던, 본부장의 왼 팔으로서의 자신은 잊어버리고, 아무런 배경이 없는 순전한 백면서생의 자세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에게 붙어있었던 그러한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질 지는 의문이다. 직장의 줄을 과신하면 안 된다. 아니 그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차라리 줄이 없이 그냥 직장생활 하는 게 낫다. 남들 보다 빨리 진급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나는 잘못이 전혀 없는데 억울하게 사직을 강요당하는 일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