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세 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당주시 나들목이 나온다. 지연은 뚫어져라 창밖을 응시하며 스쳐가는 의미 없는 풍경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마음속의 시끄러운 소리를 밀어버리려 애쓰고 있다. 윤선희. 윤선희. 선배와 함께 하는 사업이라 들었는데 그리고 분명히 장영철이라는 사람이 대표였는데 우연히 보게 된 사업등록증에 올라와 있는 대표자의 이름은 윤선희로 되어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오래전에 깨져버린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옹졸한 싸움 끝에 냉랭해진 십수 년간의 참담한 결혼 생활은 어떤 참혹한 현실이라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련이 될 거라고 위안을 삼았었다. 하지만 그 파탄을 구성하는 요소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지고 지연의 마음으로 비집고 들어서자 놀랍게도 또 다른 생경한 생채기가 되었다.
앞서 가던 고속버스는 나들목을 빠져나가 큰 도로로 들어서고 지연은 내비가 안내하는 대로 그 옆의 왼쪽 도로로 들어섰다. 내리막 길이 일반도로로 연결되자마자 나오는 회전 교차로를 돌자 길게 쭉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양옆에 늘어선 왕복 일차의 도로가 나타난다. 메타세쿼이어는 그 높이와 구부정한 마디 하나 보이지 않는 올곧음으로 뭔가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이 느껴지곤 한다. 게다가 이 나무는 늘 한두 그루가 아니고 여러 그루가 줄지어 나란히 서 있곤 하니 전체적으로 입체적인 삼각형을 이루게 된다. 그 모습은 흡사 성스러운 성당에 들어서면 보이는 고딕풍의 천장이 연상되며 신비로움을 더욱 증폭시켜 언제나 지연을 매료시킨다. 그런데 이곳의 나무들은 뭔가 추레하다고 할까 정돈되지 않은 느낌으로 어정쩡하게 서있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온전하지 않은가. 게다가 지연이 알고 있던 메타세쿼이아는 위풍당당하고 강직한 모습인데 무슨 이유로 같은 나무가 이렇게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걸까. 누군가의 메신저 문구에 나와있는 것처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는데 자리가 나무의 위상과 인상도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길을 따라가면 녹슬고 군데군데 구멍이 난 슬레이트로 벽을 댄 건물이 희미해져 앞의 두 글자는 읽을 수 없는 정미소 간판을 달고 있다. 그 옆으로는 움푹 들어간 공터를 역시 녹슨 슬레이트가 담장처럼 둘러싸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자 갓 지은 듯한 사 층 건물이 서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이제부터는 좀 정돈된 거리가 시작되나 했지만 다시금 농약사와 금은밤, 빛바랜 수제화점, 판유리를 댄 유리문에 원지 패션이라고 쓰인 가게. 크기가 제각각인 모터가 녹슨 채 바닥에 늘어져 있는 가게가 보인다. 내가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거의 50년 전의 어느 때로 돌아간 듯하다. 이 길 두 번째 오른쪽 도로를 들어서니 이제껏 본 것과는 퍽 다르게 단정하고 모던한 느낌의 이층 건물이 앉아있다. 베이지색 콘크리트와 일층과 이층 전면을 유리로 댄 이층 건물 바로 원지동 주민센터이다. 그 건물 옆에는 바닥이 고르지는 않지만 꽤 넓은 직사각형의 주차장이 있고 왼편에는 주민센터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주차장 끄트머리에 있는 계단은 주변 아파트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로 간단한 운동기구와 덩굴나무 아래로 벤치가 놓여있다. 유리로 된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실 공간이 나오고 다시 한번 유리문을 밀면 전면과 천장까지 유리로 되어있는 꽤 넓은 직사각형의 공간이 나온다. 상판마다 초록색 부직포를 붙이고 그 위에 유리를 을린 네모난 테이블들이 덩치 큰 의자와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의도는 알기 어려우나 뭔가 급조된 대기실 같은 느낌을 준다. 왼쪽으론 강당이 보이고 그 전면에 있는 유리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면 원지동 주민센터 민원실이다. 당주시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원지동은 바로 맞닿아 있는 나들목에서 장주, 금산, 인주시로 곧장 이어진다. 원래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먼 곳의 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맞는 이름이다. 이 크지 않은 도시에서 그나마 핫한 신시가지에서 30 여분이나 걸려서 왔다. 외부의 드넓은 공간과 응접실 느낌의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 그리고 휑해 보이는 이층의 느낌과는 다르게 비좁은 책상이 빽빽하게 일렬로 들어서 있다. 공간 활용의 몹쓸 예가 바로 이곳인 것 같다. 발령을 받은 오늘부터 다음 정기 인사까지 최소 6개월 이상 지내게 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