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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Aug 13. 2022

아무래도 지금 경조증인가본데요.

 8월 5일, 열흘쯤 전에, 화가 나는데 그것이 참지 못한 슬픔인가, 같은 글을 썼더랬다. 내 병식이 얕아 그것이 기저에 깔린 우울인줄만 알았는데 경조증 증상이었나보다. 약 5개월만의 재발이다. 조울증 초보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제 배우자의 생일 케이크를 픽업하러 가로수길에 갔다. 케이크를 사서 나오는데, 바로 맞은편에 피어싱 매장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피어싱을 다시 하고 싶어져서 드릉드릉하는 마음의 엔진을 카드값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누르고 있었다(몇 달째 절약하려고 노력중이다). 몇 초 쳐다보다가 큰 고민 없이 호쾌하게 들어갔다. 이 정도 돈이야 괜찮겠지 뭐. 어떻게든 될거야. 결국 양쪽 귀에 이미 뚫려 있던 10개의 구멍 중 6개를 부활시켰고, 그 때 깨달았다. 아, 나 지금 경조증 삽화인가봐. 얼마 전에 엄청 화 났던 게 전조 같은 거였구나.

  

 깨닫고 나니 지난 나흘간 나의 상태가 떠올랐다. 


<식이 관련>

일주일 전에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초반 삼일정도에는 배가 고픈데도 많이 먹지 못하는 것이 서럽고, 결국 음식 앞에 져버리는 것이 서러웠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섭식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다. 배가 고프지 않거나 배가 고파도 별로 상관이 없는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나름 '건강한' 다이어트 중이라 차마 끼니를 거르지는 못하고, 탄단지를 챙기는 식사를 한답시고 편의점 닭가슴살이나 고구마 같은 것을 사다 먹는 중이다. 반쯤 먹으면 배가 부르기도 하고 먹기도 귀찮다. 오늘도 반 개의 훈제 닭가슴살과 반 개의 고구마 한조각이 음식물쓰레기 처리기 안으로 들어갔다. 헤아려보면 평소의 1/4정도 먹는 것 같은데, 기운이 없거나 힘이 빠지지는 않는다. 다이어트에 적응이 되어 조금 먹어도 괜찮은가보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는데 병의 증상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서럽다. 증상이 잡히면 다시 배고프고 슬픈 나로 돌아가게 되지 않는가.  


<충동성, 과잉행동 관련>

 담배를 끊은 가장 큰 이유 역시 절약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간은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담배에 이렇게 돈을 많이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회용 전자담배를 하루에 몇개씩 사서 끊임없이 피웠다. 담배가 없는 상태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일하는데다 배우자의 잦은 야근으로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거의 니코틴으로 호흡하는 생물처럼 입에서 떼놓질 못했다. 가계부를 보면서 슬퍼하다가도 생각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피우고 싶은데 어떡해. 


  배우자가 야근을 해서 혼자 있는 동안 심심하다 보니, 평소엔 생각지도 않았던 외출을 계속 계획했다. 오늘은 혼자 나가서 전에 갔던 맛집에 가볼까. 그때 그 카페나 찻집에서 혼자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저녁 먹고 나가야지. 아니, 저녁은 먹기 귀찮으니까 먹지 말고 그냥 나가서 차나 마셔야지. 

  그러나 경조증 삽화가 아니라 혼재성 삽화(조증과 우울증이 같이 오는 것)인지, 피곤한 것도 아닌데 움직일 생각만 하면 정말 너무너무 싫어서 결국 나가지는 않았다. 


<과대목표 지향성 관련>

  일 하는 양도 갑자기 늘었다. 이번에야말로 작년쯤 해볼까,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던 남의집 프로젝트의 호스트가 되고 싶어졌다. 아이템을 구상하려고 다른 남의집을 30개쯤 들여다보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동네 친구 같은 것을 마구 사귀고 싶었다. 그래서 게스트로 참석하고 싶은 남의집을 다섯개쯤 추려놓고 고민했다. 동네친구라니, 이성이 있으면 배우자가 몹시 싫어할텐데. 그리고 이것까지 하면 (돈 때문에) 정말 혼날 것 같아. 갈등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싫었으므로, 남의집 참석 신청은 꾹 참았다. 

  신제품이 갑자기 마구 떠올라 몇가지를 스케치하고, 기존 제품 관련된 것을 수정했다. 움직이기가 싫으니 공방에 나가서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은 와중에, 마침 인터넷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하나도 급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며칠동안 재택근무 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기는 역시나 너무 싫어서, 들어온 주문은 미적거리며 처리하는 중이다. 

  

<과민성 관련> +약의 효능 또는 부작용

  어제는 공방 구조를 뒤집어 엎고 싶어 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가구 배치를 요리조리 바꿔보며 일단은 온갖 가구들의 상판에 오일칠을 했다. 

  마음에 안 들었던 책상 다리를 교체하려고 상판에서 분리했다. 새로운 다리는 철제였으면 싶어서 주문제작에 대해 문의하려고 모 사이트 고객센터에 전화했는데, 상담사의 응대에서 나를 막무가내인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였으면, 에이 XX거, 하고 넘겼을 터인데 어제는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십분간 울었다. 그리고 책상 다리 교체와 공방 배치 변경에 대한 모든 흥미가 식어버렸다. 아니, 그날 일에 대한 모든 흥미와 열정이 식어버렸다. 

  생각하면 계속 화가 날 것 같아서,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일단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평소에 생각이 끊이지 않는 편이므로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한다고 생각을 안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케이크를 픽업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배경음처럼 깔고(제대로 듣지 않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있다가 가끔 정신을 차리고 이번 역을 확인했다. 편안하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생각을 안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을 치워둘 수 있구나. 약을 먹으면 처지거나 멍한 기분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점점 멍(청)한 사람이 되어가겠구나. 슬플 법도 하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도 잘 되지 않는다. 생각에 대한 생각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몹시 답답한 일이다. 




  지금은 식기세척기가 내는 소음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다가, 양극성 장애 관련 유튜브와 인스타 툰을 하면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나를 막 팔로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유튜브야 그냥 하면 될 것이고(아니다), 인스타 툰을 연재하기엔 그림을 못 그리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역시 아니다). 

  오늘은 병원 예약이 꽉 차서 방문하지 못했다. 휴일들이 지나면 가서 이야기해야지. 처방해준 약을 먹었는데도 삽화가 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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