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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Apr 25. 2022

이토록 기쁜 선물

몰래 적는 사랑고백 4

 4월 초부터 내내 바빠서 수업도 미뤄가며 거의 매일 밤 11시 넘어 퇴근했다.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출근해서 급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앨런의 입장이 강경했다. 이번주에는 꼭 함께 영화를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예약한 영화가 <신비한 동물사전 3>였다. 

 우리가 함께 이 영화의 전편들을 vod로 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도 알다시피, 나는 <불사조 기사단> 단행본에서 시리우스의 죽음을 접한 이후로 해리포터와는 연을 끊은 상태였다(영화도 <불의 잔>까지만 보았다). 그 또한 해리포터 시리즈는 한국인 평균으로만 챙겨본 정도여서, 그가 <신비한 동물사전>을 꼭 보겠다고 한 것이 의아했다. 

 한달 내내 바빠서 결혼기념일에도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하지 못하고 외식 후 집에 와서 잠만 잤으니, 그정도 시간은 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는 건 금지되어 있던가', '팝콘 먹고 싶다' 따위의 대화를 하며 아무 기대 없이 입장한 상영관 스크린에서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배우가 나오고 있었다. 


 영화는 재미 없었다. 재미 없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에 단호한 내가 상영관을 뛰쳐나오지 않고 끝까지 앉아있던 것은 오로지 좋아하는 배우가 미드센츄리의 정장을 입고 마법을 쓰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재미 없는 것, 아름답지 않은 것에 단호한 앨런이 상영관을 뛰쳐나오지 않은 것은 오로지 배우를 보는 나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앨런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는 소식 단 하나 때문에 이 영화를 예약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달에는 꼭 쉬고야 말것'이라며 끝없이 지쳐가는 내게 의미있는 쉬는시간을 선물하고 싶어했고, 그 선물을 받은 나는 더없이 기뻤다. 


 앨런은 끊임없이 나를 북돋아준다. 그리고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도록 한다. SNS 유입을 늘리기 위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사서 제품과 함께 놓고 사진을 찍겠다는 나에게, 관심없는 베스트셀러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정말로 읽고싶은 책을 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도-베스트셀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골수 인디파일 뿐이다- 그다지 관심없는 스티커들을 함께 봐주고 가격에 놀라면서도 '예쁘면 사라'고 하는 것도 모두 나에겐 힘이 되는 말이다. 내가 내가 아니려고 하거나, 나로 존재하고 싶어 고민할 때 '나일 수 있는 길'을 응원하는 줄 맨 앞에는 항상 그가 있다. 


 휴무일인 오늘,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앨런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던 혼자만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쌓인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점심을 훌쩍 넘겨 기상한 탓이다. 앨런이 만들어주는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자 그는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마음이 지쳐 아무렇게나 죽음을 말하는 나에게 위에서 언급한 배우가 나오는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를 보자고 말한다. 덕분에 나는 아직 여기에 있고,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내려갈 때면 줄의 맨 앞에 있는 네가 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너와 고양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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