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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노마드 Jun 14. 2021

의사로서 영어가 필요했던 순간들

그리고, 엄마표 영어가 필요했던 순간


레지던트 수련 시절 나의 지도교수님께서 검사실로 호출하셨다. 무슨 일일까.

교수님의 호출이니 0.1초 내로 미생물검사실로 내려가야 했다. 내가 호출된 이유는 영어 통역이었다.

내 영어실력이 동시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당시 과에서 나름 영어가 되는 전공의로 분류되었던지라 당시 교수님의 외국인 손님이 오셔서 교수님께서는 나의 도움을 빌리고자 하셨던듯하다. 그 손님은 인도에서 오신 박사님이셨다. 즉, 인도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바이오나노분자 분야에서 박사과정이신 청년이었다. 자연과학 전공자로 미생물 진단 관련 의료기기를 개발하고 계신 연구를 하고 계셔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만드신 가설이 의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는지 자문을 구하고자 방문하셨다.


  

 보통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열이나면 피를 뽑아서 검사를 한다. 큰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면역력이 약해져있고 여러가지 카테터(일종의 몸에 연결된 호스들)를 가지고 있어 외부 균에 의한 감염에 취약한 상태이다. 이럴 경우 항생제를 정맥주사하여 빠르게 치료를 해야하는데 균마다 잘듣는 항생제가 다르고, 어떤 균들은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고 있어서 미생물검사실에서 피검사를 통해 어떤 균에 감염되었는지, 그 균이 치료제에 내성이 있는지를 알아낸다. 하지만 환자에게 뽑은 피를 1-3일간 배양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인도청년은 그 배양검사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검사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검사법을 개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당시 내가 이해했던 내용이었다.

그 이후에 펼쳐진 인도청년의 자세한 설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그때 한창 수련중인 레지던트였고, 통역이라는 임무를 띄고 그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바이오나노분자쪽 지식에는 전무했기 때문에 그 인도청년이 하려는 새로운 시도와 가설, 세부 사항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계셨던 교수님은 그의 설명이 임상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왜 말이 안되는지를 한국말로 설명하셨다. (나에게 영어로 설명하라는 뜻으로.) 하지만 내 머리속은 이미 인도청년 이야기가 붕떠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교수님이 답변도 속시원하게 영어로 전달할 수 없었다.

두 분의 분야 모두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들의 대화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드리지 못했다. 통역이라는게 영어만 말할 수 있다고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자리였다.  



 그동안 영어공부에 관심을 놓지 않고 꾸준히 붙잡고 있었던 덕분에 살다보니 교수님이 통역으로 호출해주시는 영광도 누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사실 학창 시절에 영어란 과목은 나에게 그냥저냥 수능을 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난 전형적인 이과형 인간으로 학창시절 영어를 그다지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 보니 모든 전공 교과서가 영어 원서였다. 대부분은 교수님 수업을 충실히 듣고 필기하고 기출문제를 여러 번 풀면 시험 준비가 충분했기에 꼭 영어원서를 다 읽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늘 가슴 한편엔 이 두꺼운 원서를 한글책 보듯 쭉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것 같다.



내 학창 시절의 영어시험 평가기준은 시험이었다. 영어 등급 몇 퍼센트 안에 들기 위해 독해 문제집과 문법 설명서를 열심히 파고 연습하면 점수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수능을 보고 좋은 점수를 얻었기 때문에 내심 내 영어실력은 괜찮은 편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그러다 처음 대학교에서 원서를 마주했던 순간을 시작으로 내 영어실력에 대한 현실 자각이 생기면서 일단 공부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가기 위해 영어 원서를 빨리 읽는 능력을 길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 이후로 바로 강남에 있는 유명 어학원에 등록했다. 그 학원에서 등록한 수업은 듣기 및 회화 수업이었다. 시트콤'프렌즈'로 하는 수업이었고 프렌즈 에피소드를 함께 보고 일부 딕테이션(받아쓰기)을 한 다음 사람들과 내용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으로 기억한다.

첫 수업.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보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 기적. 수업내내 거의 아무것도 입뻥끗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매 번 수업 가기 전날 학원에 가기 싫어 몸무림 치다가 반도 출석을 못하고 씁쓸하게 학원비를 날려던 추억이 남았다.

 


이렇게 첫번째 실패를 뒤로하고, 내게 한줄기 희망이 된 것은 그 당시 큰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정찬용 씨의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이다. 주인공이 단기간에 영어를 잘하게 된 비결을 여자 부하직원에게 조언해주는 이야기인데 스스로 여자부하직원에 빙의하여 그 책 주인공이 조언하는 대로 하루에 10시간씩 CNN 뉴스, 시트콤 등 영어로 된 테이프를 우구장창들었더랬다. 그러면서 그 주인공처럼 영어를 잘하게 되길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번째 실패.


그 후 EBS 교육방송의 수능 영어 선생님이셨던 이근철 선생님이 밀고 계셨던 패턴영어에 솔깃해서 책을 구입했다. 난 고3때도 그분의 팬이었다. 그분을 믿고 책에 나온 기출 문장을 반복하고 따라 하며 외우고 단어를 바꿔가며 익혀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작 원어민을 만났을 때 내가 외운 패턴영어문장은 몇 번 쓸 일도 없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뭐랄까.. 패턴영어는 드넓은 영어의 대양에 한 숟갈의 소금물 같다는 생각이 들며 영어정복의 길은 더 묘연해진 듯했다.




이렇듯 지금까지 나는 영어공부의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내가 언어 쪽으로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닌 데다, 미국에서 1-2달 정도 단기연수 내지는 여행 외에는 현지에서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이 방법, 저 방법 좋다는 것은 시도해보다 보니 시행착오가 길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부터 오기가 생긴 것인지 왠지 영어는 나에게 평생 프로젝트 같이 숙제도 남아있었다. 아니, 버킷리스트에 남아있는 것 같다. 정녕, 난 죽기 전에 원어민 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할 수 없는 것인가.



 의사라고 하면 영어 쓸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특히 내 전공인 진단검사의학과는 환자를 보지 않은 비임상과인 대신에 여러 가지 검사 관련 최신 동향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기 위해 국제저널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실적이 수술이나 시술이 아닌 논문인 과이기 때문에 레지던트 수련과정에서도 논문을 빨게 읽고 정리하여 발표할 기회가 많았고, 국제학회지에 연구논문을 많이 쓰도록 독려받았다. 때로는 영어발표를 해야 할 기회도 빈번했다.

게다가 최근엔 국내 학회도 국제학술대회로 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연구한 내용을 영어로 발표하고 논문을 쓰는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내가 근무하는 수탁 의료기관에서도 국제학회에 논문이나 초록을 발표하는 것을 독려하고 권하는 분위기라 영어공부에서 졸업하긴 힘든 것 같다.




지금까지 영어공부를 하다 말다 하다 말다 이어오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영어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우리말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 남의 말 경청하기 - Listening and Understanding

2. 글을 읽고 이해하고 내 지식으로 만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 Reading

3. 조리 있게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 이야기하기 혹은 글로 표현하기 - Speaking and Writing



  시중에 나오는 영어방법론들을 살펴보면 물론 틀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숲을 보기 보다는 나무에만 집중한 느낌이든다. 현지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저절로 느끼기 때문에 뭐가 중요한지 어떤걸 익혀야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쓸 필요가 없는 한국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게 되면 보통 학교나 학원, 교제에서 가이드하는 커리큘럼에 따라 익히게 되고 영어는 배우지만 쓰지 못하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 매달려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일이 쉽게 벌어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가 하나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깨닫고 시작한다면 먼저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줄 알고, 남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글을 읽고 핵심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헤매지 않았을 것같다. 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시작한면 국내에서도 시중에 나온 많은 방법론들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나는 우리 아이가 나처럼 영어때문에 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길 바랬다. 그래서, 아이가 어릴적부터 엄마표영어를 실천해야겠다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영어교육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엄마표 영어'란 단어는 익숙하다. 엄마가 집에서 영어환경을 제공해주어 아이의 영어를 늘게 해준다는 컨셉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결심하게 되었다. 일하는 엄마이지만 엄마표 영어를 해보기로. 일하는 엄마가 엄마표 영어를 하면서 가능했던 것과 포기한 것 그리고 생각들을 기록해보기로. 그래서, 워킹맘도 가능한 엄마표 영어의 기술을 앞으로 하나씩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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