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의 삶의시작
하루카의 딸 미희는 고 대감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늦둥이로 얻은 미희를 고 대감은 어디를 가든지 데리고 다녔다.
고 대감이 읽는 서적을 미희는 이미 여덟 살에 읽기 시작했고, 일본어는 물론 영어와 러시아어, 독일어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군 식량과 일본인의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고 대감의 집에는 많은 서양인이 드나들었고, 그는 당시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각종 서양 서적과 일본 서적, 서구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국 정통 양반의 품위와 일본 상인의 지혜롭고 친절함을 모두 지닌 아름다운 미희를 보며, 고 대감은 장차 큰 일을 할 여인이 될 것이라 늘 생각했다.
미희는 팔과 다리가 긴 전형적인 조선 양반의 몸매에, 활짝 웃는 눈과 입은 일본 상인 쇼베이(庄兵衛)를 꼭 닮았다.
사근사근하고 따뜻한 음성은 일본의 전형적인 여인을 떠올리게 했지만, 결단력 있는 눈빛과 도도한 발걸음은 조선 양반 여인의 모습이었다.
고 대감은 미희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곧 하인들을 불러
“미희가 어디에 있느냐? 안전한 곳에 있는지 보고 오너라.”
하고 명령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고 대감의 부인은 미희를 증오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인생을 망쳐 놓은 요괴라고 여겼다.
미희를 낳기 전에는 그래도 몇 마디 친절한 대화를 나누던 부부였지만, 이제는 평생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마음이 잘 통하고 대화가 되는 미희가 늘 고 대감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 대감의 부인은 조울증이 점점 심해져, 한 달 내내 어두운 방에서 누워 지내다가 갑자기 일본 장군들의 부인들과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며 값비싼 선물을 퍼부었고, 감정 기복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38년, 일본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어린 소녀들의 위안부 조직적 강제 동원 등을 강요하며 권력의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편 항일 유격대 등 공산 조직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고, 만주 지방과 함경도 북부, 백두산 일대에는 공산당 빨치산들이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친일파였던 고 대감은 일본 제국주의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박식한 지식과 인맥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를 이용하고 있지만, 시대가 바뀌어 만약 항일 유격대가 실권을 잡게 된다면 그의 재산은 탈취될 것이고, 일본 제국주의를 도왔던 집안은 모두 처형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끝없이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고 있던 부인을 어느 날 고 대감은 서재로 불러들였다.
각 방을 쓰며 지내던 고 대감의 부인은 안채에서 나와, 대감이 거하던 사랑방 옆에 크게 만든 서재로 들어갔다.
“좀 앉으시오, 부인.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국이 어지럽고 일본 제국의 미래도 불분명하오. 조선의 앞날도 너무나 불투명하니, 너무 소란스럽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연회는 더 이상 열지 마시오. 장군들의 부인들과는 간소한 다도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소.”
고 대감의 부인은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감히 누구인지 알고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나는 당대 영의정의 손녀딸이오! 대일본제국의 앞날이 불분명하다니… 어디서 그따위 방자한 말을 하는 것이오? 남편이라도 그런 배신자의 말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소!”
고 대감의 부인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때 미희가 서재로 책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미희는 고 대감의 서재에서 서양 책과 일본 책을 보따리에 싸서 가져가 읽고, 다시 싸서 돌려놓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읽어가고 있었다.
미희의 얼굴을 증오 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부인은 갑자기 미희의 뺨을 철썩 때렸다.
“어디 감히 서출 계집이 영의정 손녀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느냐! 이년, 눈을 낮추지 못하겠느냐!”
“마님, 용서하십시오…”
미희는 눈을 내리고 땅을 보았다.
방 안에서 고 대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희야, 어서 들어오너라. 오늘은 베르그송 책을 가져가거라.”
고 대감 부인의 눈이 증오와 질투로 불타올랐다.
“천작쟁이들과 붙어다니며 양놈 책이나 읽고, 대일본제국의 미래를 의심하는 나약하고 한심한 조선 양반들! 다 저주를 받으리라!”
부인은 미희를 밀쳤고, 떨어진 보따리를 밟고 지나갔다.
미희는 보따리를 줏어서 흙을 조심스레 털고 끌어 안았다
미희에게 책은 미희가 꿈꾸는 모든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비밀 주문 같았다.
책 속에 얼굴을 알지 못하는 엄마가 있었고 책 속에 알지 못하는 아름답고 평화스런 삶이 있었다.
꿈을 꾸는 것같은 눈을 하고 있는 미희는 고 대감이 들려주는 서양 문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언젠가 반드시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유럽에 꼭 가 보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 고 대감과 일본서적과 서양 서적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미희의 유일한 즐거움 이었다. 그리고 한가지더 미희는 엄마 하루카를 닮아 나무조각 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하루카가 해 주었던 조각을 보여주며
“네 엄마는 요리도 정말 잘 했었고 이렇게 조각도 잘 했었다” 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어머니가 항상 일 하셨다던 부엌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부엌의 장작더미 앞에가서 멍하니 서서 장작더미 안에 어머니의 얼굴을 떠 올려 보려고도 했다.
그리워 할 수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워 하는 것이 미희가 부엌의 장작더미를 보며 하던 일상이었다.
그리고 미희도 작은 나무 장작에 사람들의 얼굴을 새겼다.
하루카가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조각을 했듯이 미희도 어머니를 그리며 나무 조각을 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미희는 하루카를 닮아갔다.
고 대감의 부인은 이렇게 혼자 부엌에 가서 책을 읽고 장작을 멍하게 쳐다보는 미희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하루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난 것만 같은 망상에 빠졌다.
고대감 부인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귀에서는 알수없는 목소리가 계속
“ 미희를 죽여야 한다. 미희를 죽여라..”
라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래서 하루는 어린 무녀 청아를 팔았던 남자무당, 박수무당을 찾아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점쳐보고, 미희에게 저주를 걸 부적을 사기 위해서였다.
정신적으로 조울증·집착증·과대망상이 점점 심해져 미희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고 대감의 총애를 받는 미희를 직접 죽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미희가 태어난 것도, 자신과 무당 청아가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기에 더욱 분하고 억울했다.
박수무당은 고 대감 부인을 반갑게 맞으며 아부를 늘어놓았다.
“왕실로 들어가실 귀인이 어찌 이 원산까지 오셨습니까.”
“해가 갈수록 왕실의 품위가 흐르십니다. 시국이 흉흉해 이 험한 원산에서 일개 군수 나부랭이와 혼인하시어 이 고생을 하고 계시니…”
박수무당은 늘 고 대감 부인이 왕실과 혼사로 이어질 신분이었으나, 팔자가 뒤틀려 군수와 혼인했고 자녀도 없어 심기가 어지럽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네. 자네에게 산 그 청아의 잘못된 점괘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네. 여우 같은 미희 년이 대감을 홀려 집안에 대사가 막히고, 나까지 무시하고 있네. 미희 년이 즉사할 부적을 만들어 주게.”
박수무당은 손에 쥐고 있던 마른 나뭇조각을 책상 위로 던지고는 유심히 살폈다.
“죽이는 건 안 되오… 그리고…”
그의 눈이 흰자위만 드러나더니, 노래하듯 끊어진 박자로 경을 읊기 시작했다.
“이미 집안에 저주가 있어, 음기가 음기를 죽이는구나…
애미도 죽고, 딸년도 죽는구나…
피가 피를 덮어 태어나고, 피가 피를 죽이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요?”
“태어날 때 애미를 죽이고 태어나는 저주의 음기요.
하루카의 애미도 그랬고, 미희의 애미도 그랬소.
그리고 미희가 낳을 딸이 미희를 죽일 것이오.”
“요절한단 말이오?”
“제 어미처럼 열여섯에 죽을 팔자요.
그리고 할미처럼 개같이 길에서 죽을 팔자요.”
고 대감의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운명, 절대로 바뀌지 않겠지요?”
“타고난 운명대로 요절하고 객사하길 원하신다면, 미희의 머리카락을 가져오시오. 내가 다시 저주를 하겠소.”
“내가 박수무당 말을 안 듣고 청아 년을 믿어 일이 이렇게 됐소. 그때 기억하오? 딸이 태어날 것이니 낙태시키라 하셨지. 하루카 등 뒤에 부적만 붙였어도 낙태가 됐을 테고, 아니면 오두라도 먹였으면…”
“요절시킬 부적 값은 200원이오.”
“반드시 열여섯에 죽어야 하오.”
“내놓는 돈만큼 효력이 있지요.”
박수무당이 간사하게 웃었다.
고 대감의 부인은 박수무당에게 210원을 주고는 대궐로 향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다스리기 어렵다.
인류는 이 다스릴 수 없는 증오 때문에 전쟁을 하고, 살인을 한다.
어떤 때는 이 거대한 증오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대부분 이렇게 조절되지 않는 증오는 자신을 향한 증오에서 시작된다.
조선이 무너지던 그 시절, 한때 영의정의 손녀딸이었던 고 대감의 부인은
자신에게 남은 것이 빈껍데기 같은 신분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미희의 총명함과 젊음, 진실된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권력임을 느끼고 있었다.
기존의 직위나 관직, 양반의 감투 따위는 더 이상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었다.
새로운 여성의 생각이 사랑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 대감의 부인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