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감과 최의사

1945년 8월 15일, 충청북도 청주

by Siesta

1945년 8월 15일, 충청북도 청주

하루카와 최 의사, 그리고 다섯 살 된 아들 도원이가 라디오 앞에 숨을 죽이고 앉아 방송을 듣고 있었다. 지지직거리는 강한 전파 잡음과 함께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라디오에서는 긴박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오부터 중대 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신민들은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천황 폐하께서 몸소 대동아 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를 낭독하시겠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장엄하지만 어딘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곡이 끝나고, 가늘고 높은 톤의 다소 생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시 천황의 목소리는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았고, 고어(古語)인 궁중어를 사용했기에 일반인들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짐(朕)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안하여, 비상한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 이에 충량(忠良)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전쟁의 국면은 반드시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열고자,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음으로써(堪所難堪 忍所難忍), 이로써 평화의 문을 열고자 하노라."

방송은 약 4분간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다시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끊겼다. 잠시 뒤, 아나운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방금 들으신 것은 폐하의 대자대비하신 결정이셨습니다. 일본 제국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을…."

최준이 의사가 하루카의 손을 꼭 잡았다. 최 의사의 아내는 아들 도원이가 태어나고 1년 후 결국 심장병으로 단명하고 말았다. 최 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최 의사에게 하루카와 같이 도원이를 키우라는 유언을 계속해 왔다. 결국 홀로 된 최 의사는 하루카와 동거하며 셋이 가정을 만들어 도원이를 키우고 있었다.

장인인 송 대감은 딸 송가인이 죽자 최 의사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결국 최 의사는 성씨를 송씨로 바꾸고 송 대감의 아들로 입양되어, 송가인의 아들 도원이는 '송도원'이 된다.

완전히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던 최 의사의 부모님은 많은 빚을 지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고, 최 의사의 동경 유학 비용을 모두 부담했던 송 대감을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송 대감이 하루는 최 의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도원이는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하나밖에 없는 사내아이인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내가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나에게 자네 같은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자네를 일찍이 사윗감으로 점찍고 동경 유학 자금을 대 준 것도 알고 있지 않나? 가인이가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 이제 자네와 나의 인연은 도원이뿐이니, 자네가 나의 아들이 되어 도원이가 나의 성씨를 갖게 하는 것이 자네나 나나 도원이를 위해 최상의 선택이라고 보네. 내 벌써 자네의 부모님과도 모두 이야기를 끝냈어. 자네가 내 성씨를 가진다면 내가 가진 모든 땅과 건물, 그리고 일본에 있는 땅과 집도 모두 자네와 도원이에게 물려줄 것이네. 지금 만들고 있는 회사도 모두 자네와 도원이에게 물려줄 것을 약속하니 자네 부모님도 성을 송씨로 바꾸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셨어.”

최 의사는 빚더미에 몰려 있던 자신의 부모가 큰아들인 자신을 송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이제는 양자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송 대감이 말을 이었다.

“개인도 나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신의 뿌리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네. 썩어가는 뿌리는 단호하게 쳐내고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결국 나무는 죽게 되어 있지.” “네, 장인어른과 제 부모님이 벌써 그렇게 정하신 것이라면 뜻에 따르겠습니다.”

최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썩어 보이지만 잔뿌리를 내리며 버티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이렇게 최준이 의사는 '송준이' 의사가 되어 하루카와 동거하며 도원이를 키우고 있었다. 하루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최 의사를 보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송준이가 하루카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도원이 외할아버지가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바로 그날, 이미 반공 정치 단체를 만들 계획을 세워 두셨소. 영어를 하는 사람도 섭외해 놓았으니, 아마 오늘 공식적으로 간판을 걸고 인천항으로 들어올 미국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다음 달쯤 인천으로 갈 계획을 하고 계십니다.”

나라의 주인이 또 바뀌었다. 송 대감은 이 땅이 곧 강대국들에 의해 찢길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송가인의 아버지 송 대감은 정세를 빨리 파악하는 인물이었다. 친일파였던 송 대감은 다음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들이 미국인이라는 것을 빠르게 직감했다.

그는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집요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많은 서양 서적을 읽어 미국의 자본주의가 다음 세대의 인류를 지배하는 맥락이 될 것임을 통찰하고 있었다. 몸이 약한 딸의 남편으로 몰락한 양반인 최 의사를 골라 유학까지 보내 사위로 만든 것, 그리고 그렇게 얻은 도원이를 자신의 대를 이을 손자로 만든 것은 송 대감이 얼마나 치밀하게 미래를 구상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철학은 한가지였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하지만 돈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대로 돈을 쓰는 사람들이 미래를 만들어간다.'

송 대감은 무조건 미국 편에 서서 특히 '반공'을 내세우면, 친일파였던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며 권력과 재물을 모두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반공산당 단체를 만들고 미국의 권력층을 섭외하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영어 학원을 만드는 등 새로운 세력을 위해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 자체 조직을 완전히 믿지 못했고, 단기간 내에 남한 내 안정적인 세력 구축을 위해 기존의 한국인 관료와 경찰들을 그대로 정권의 핵심에 앉혔다. 이렇게 해서 이북과는 완전히 다르게 남조선은 일제 강점기 당시 부역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정권을 가지게 된다.

하루카가 최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일본 사람의 딸인데요… 저를 심판하지 않을까요?” “하루카, 당신은 도원이의 엄마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루카는 도원이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갔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안에만 있을 수 없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서성거리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수군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행복이 찾아온 것처럼 만세를 열광적으로 외쳤고, 어떤 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일본인 행상 쇼베이의 딸, 친일파 고 대감의 후처, 그리고 도원이의 양어머니가 된 하루카는 일본도, 일본 통치하의 조선도 아닌 '또 다른 세상'인 조선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최 의사, 아니 송 의사가 있었고,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송도원이가 있었다. 혼돈된 세상 속에 사랑하는 한 사람과 사랑해야 할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하루카는 너무나 감사했다.

그녀는 이북 원산에 두고 온 딸 미희를 생각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미희에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등에 업은 도원이를 토닥거리며 하루카는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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