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평생을 같이 사는 일은 사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우리 인간들은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카와 최 의사는 마치 하늘이 맺어 준 인연처럼 절대로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지만, 일본 행상의 딸로 나이 많은 친일파 양반의 대리모가 된 고아인 여자와 그 당시 동경제대를 나와 의사로 일하고 있는 최 의생이 함께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은 1940년 조선 땅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카는 그저 그날그날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아무런 보호자가 없는 고아 소녀였고, 최 의사는 청주의 내력 있는 양반 가문의 맏아들로 부모님의 모든 기대 속에서 동경 유학까지 하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은 절대로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해 가을 최 의생은 송 대감 대 지주의 셋째 딸과 혼인을 올린다.
딸만 셋인 송대감은 일찍 최의사를 데릴사위로 생각하도 동경유학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송 대감의 딸 송가인은 마음이 곱고 무조건 순종하는 ‘착한 여자’였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집안이었던 최 의사의 집안에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지고 있던 송 대감의 셋째 딸 송가인과의 혼인은 집안의 경제력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송가인은 남자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조선 양반 여자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남편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여자였다.
결혼하고 3개월 만에 임신을 하여 두 집안 어른들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송가인은 몸이 약하고 지병인 심장 질환이 있어서 임신 기간 동안은 제대로 이불에서 일어나 산책조차도 힘들어했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안방에 누워 몸조리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만 마음속에 하루카를 품고 있는 남편의 심정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 전부터 송가인은 최 의사와 하루카의 사이를 소문을 들어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려서 심장병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송가인은 결혼해서 임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예감하고 있었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여성의 의무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라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당시 유교 사상은 한 여인이 인생을 살 때 세 남자를 섬기고 순종할 것을 의무화한다.
아버지, 남편, 그리고 아들에게 순종하는 삶이다.
송가인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최 의사와 결혼하고 최 의사의 뜻에 따라 아들을 임신한다.
그리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만약 자신의 건강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생각해 놓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다.
결혼한 이후에도 최 의사와 하루카는 매일같이 용화사에서 만나 불공을 드리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하루카의 골반 만성 염증은 결국 하루카를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으며, 하루카는 이제 막 20대가 된 자신은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닌, 그리고 엄마이면서 엄마가 아닌,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이상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최 의사는 착한 아내,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해 내내 방에 누워 지내야 하는 송가인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하루카 사이를 맴도는 이상한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둘이 나란히 불공을 드리며 최 의사가 말을 꺼냈다.
“언제든지 좋은 남자를 만나면 나에게 먼저 말해 주십시오.”
하루카가 물끄러미 최 의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부담이 되십니까?”
최 의생이 말했다.
“부담이라니요. 하루카가 없는 나의 삶은 지옥입니다. 하지만 하루카가 함께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남자를 만난다면….”
“선생님, 제가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제 아버지 쇼베이를 아시는 분, 저를 돌보아 주신 고 대감님을 아시는 분, 그리고 제게 딸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은 이 세상에 최 선생님뿐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곁을 떠나야 한다면 제 존재도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하루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최 의사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카는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에게도 상관이 없는 여인이 되었다.
하루카의 존재가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최 의사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최 의사는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최 의사가 더 이상 하루카를 사랑하지 않아 하루카에게 청주를 떠나라고 강요한다면, 하루카는 자신의 과거 삶을 모두 묻어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후면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시 변할 것입니다. 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습니까?” 하루카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 선생님의 아기를 한 번 안아 보게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최 의사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루카의 손끝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며 그렇게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달 후에 송가인은 아들을 낳았다. 길 도(道) 자와 깊은 원(遠) 자를 써 도원(道遠)이라고 불렀다. 길고 힘든 출산으로 낳은 아들을 제대로 한 번 안아 볼 수도 없게 부인 송가인의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고 송가인은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 있거나 겨우 앞마당을 조금씩 산책하며 기력을 되찾고 있었다.
마당을 천천히 걷고 있는 부인을 보며 최 의사가 말했다.
“당신이 마당을 걷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부인 송가인이 최 의사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몸이 이리 약해서 내 아들도 하나 제대로 안아 주지 못하니 정말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건강하고 잘생긴 아들을 낳아 주어 집안에 경사를 만들어 주신 분인데요.”
송가인이 가까이 다가와 최 의사의 팔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낳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최 의사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부인을 부축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부인 송가인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집안엔 지병이 있어 요절하신 조상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루카와 결혼하여 제 아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최 의사는 너무 놀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본인이 죽을 것을 걱정하는 부인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과 하루카의 사이를 알아챈 것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송가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놀리듯이 최 의사를 보았다.
“부인이 그걸 몰랐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부인은 힘없이 웃으며 최 의사의 팔을 잡았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하루카를 교생으로 써서 일본말을 가르치십시오. 그럼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잡고는 가파르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집안에 협심증(Angina Pectoris)이 많아 요절한 조상과 친척이 많은 송가인은 자신의 병이 심장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최 의사는 송가인을 부축하여 안방으로 데리고 가서 눕혔다. 부인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는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병원으로 가시겠습니까?” 최 의사가 부인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부인 송가인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많이 자고 나면 좋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조금 잘 것이니 당신은 나가서 일 보십시오.”
최 의사는 부인을 두고 방을 나왔다. 최 의사는 자신이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하고 있고 두 여인이 자신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둘 중 하나가 없는 미래를 생각하자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부인 송가인이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것은 출산 이후 거의 6개월이 지난 때였다.
이때부터 최 의사와 송가인은 청주의 중앙로 근처를 아기와 함께 유모를 동행해 산책하며 사람들에게 아기를 보였고, 두 사람의 원만한 부부 관계를 내비쳤다. 청주의 많은 사람이 최 의사와 하루카가 연인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이를 안고 산책하는 부부의 모습은 사람들의 소문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따뜻한 봄날씨가 계속되고 목련이 피던 4월, 아기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 부부는 중앙로 근처의 신발 가게에서 하루카를 만난다. 송가인이 먼저 하루카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제 남편을 도와 일하시는 하루카 씨죠?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얼굴은 못 뵈었네요. 일본 분이라고요?”
하루카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신발을 떨어뜨렸다. “아… 안녕하세요. 출산을 축하드립니다.”
“너무 몸이 안 좋아서 밖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조선말을 조선 사람처럼 잘하시네요.”
“네… 조선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일본 분이시고요.”
송가인은 하루카의 섬세하고 강한 손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아기가 이제 막 수유를 끝내고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아기를 보아 주시고 일본말을 천천히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유모는 한국 사람입니다. 일본 선생님을 그렇지 않아도 한 분 고용하려고 했었습니다. 제 남편이 오랫동안 알던 좋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송가인의 제안에 하루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 네, 저는 지금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여보, 하루카의 병원 근무를 3일로 줄이고 나머지 4일은 우리 집에 와서 도원이를 돌봐 주면서 일본말을 천천히 가르치는 것을 허락해 주셔요.”
최 의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송가인이 말을 이었다.
“지금 창고에서 지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집에 작은 방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 와서 계시면서 아이를 돌보아 주십시오.”
하루카가 떨어져 있던 신발을 주우며 최 의사와 송가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예쁜 신발을 고르셨네요. 부탁하는 의미로 제가 신발 값을 내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답변 바랍니다.”
송가인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갓난아기의 신발 값과 하루카의 신발 값을 내고는 유모와 아기를 데리고 신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최 의사가 하루카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부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당신이 말 못 할 것 같아서 제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연히 여기서 만난 것도 부처님의 뜻인 것 같고요. 아마도 전생에 하루카와 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알던 사람 같고 신뢰가 가네요. 무엇보다도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원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송가인은 자신이 낳은 아들을 돌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아들을 돌봐야 한다면, 하루카는 부처님이 보내주신 도원이의 엄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질투도 시기심도 후회도 그 어떤 감정도 모두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만들어 버린다.
송가인의 아들 도원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질투도 시기심도 모두 구름을 몰아내는 바람처럼 마음의 모든 나쁜 감정들을 날려 버렸다.
송가인은 똑똑하고 현명한 일본인 하루카가 최 의사의 옆에서 자신의 아들 도원이를 돌보아 줄 것을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두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얕은 기침을 하는 송가인을 보며 최 의사는 두 여인을 사랑하는 자신의 심장이 느껴져 목이 메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