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서울

청아의 선택

by Siesta

1945년 8월 15일 경성 권번

청아와 미산 부인 그리고 청아의 다섯 살 된 어린 딸 마리(Mari / 真理)가 라디오 앞에 앉아 일본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듣고 있었다. 지지직거리는 강한 전파 잡음과 함께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긴박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오부터 중대 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신민들은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천황 폐하께서 몸소 대동아 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를 낭독하시겠습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장엄하지만 어딘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곡이 끝나고, 가늘고 높은 톤의 다소 생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시 천황의 목소리는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았고, 고어(古語)인 궁중어를 사용했기에 일반인들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짐(朕)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안하여, 비상한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 이에 충량(忠良)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청아는 하루카가 조각해 준 일곱 개의 작은 얼굴 조각이 든 천 주머니를 꽉 쥔 손으로 딸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전쟁의 국면은 반드시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열고자, 견디기 힘든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음으로써(堪所難堪 忍所難忍, 감소난감 인소난인), 이로써 평화의 문을 열고자 하노라."

방송은 약 4분간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다시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끊겼다. 잠시 뒤, 아나운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방금 들으신 것은 폐하의 대자대비하신 결정이셨습니다. 일본 제국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을…"

미산 부인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청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청아는 5년 전에 출산한 경부장 이시마루의 딸 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미산 부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 나라의 주인이 또 바뀔 것입니다.”

일본의 이시마루의 연인이었던 청아는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청아야, 그게 무슨 말이야?” 미산 부인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이시마루가 전에 제게 말해 주었어요.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미 무서운 속도로 남진하기 시작했다고요. 미국이 소련군이 조선을 모두 통제할 것을 우려해서 이미 점령 경계선을 원산 아래쪽으로 그었다는 것도 말해 주었어요. 나라의 주인이 일본이 아니라 소련과 미국 중에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둘이 되겠죠.”

이렇게 말하는 청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시마루의 딸을 낳은 청아는 일본 정부가 물러가고 다른 통치자가 들어선다면 자신과 자신의 딸의 미래가 다시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산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여기서 못 사는 거야? 어디로 가야 하지?”

“제가 만나는 아일랜드 신부 토마스에게 가서 상의해 보겠습니다.”

청아는 서울의 명동에 있는 천주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Sœurs de Saint-Paul de Chartres)에 가끔 가서 유럽에서 왔다는 새로운 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이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곤 했었다. 그때 우연히 이곳에 있던 아일랜드 성 골롬반 신부 토마스를 알게 됐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으로 선교를 위해 와 있던 이 신부는 청아의 이상한 눈빛과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 같은 미소에 끌리고 있었다. 토마스는 청아의 딸을 천주교 세례 받게 했으며 계속 청아에게 십자가를 선물하는 등 크리스천의 신앙과 철학을 가르쳐 보려고 하던 신부였다. 또한 마리가 태어나던 1940년부터 토마스는 청아와 마리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기생으로 혼자 아이를 낳아 미산 부인과 함께 딸을 키우며 계속 기생의 명성을 유지하는 청아의 자생력에 감탄하며 여성의 이 신비로운 모성의 본능을 마리아가 예수를 키운 것에 비교하며 항상 청아를 돕고 있었다.

“토마스란 사람이 뭘 도와줄 수 있겠어?”

“전에 토마스가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제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어요. 지금 제가 토마스에게 배우고 있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랍니다. 나라의 주인이 다시 미국이 된다면 저와 마리는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어떤 길이 열릴지도 몰라요. 그리고 토마스는 미국과 같은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왔으니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미산 부인은 청아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산 부인의 가족은 이제 청아와 마리뿐이었다. 청아가 마리를 출산한 그날부터 미산 부인은 청아의 딸을 자신의 친딸처럼 돌보아 왔다. 출산 후에도 처녀 같은 몸매와 미모로 다시 돌아온 청아는 곧바로 다시 접대와 공연 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산 부인이 말했다.

“그럼 마리 아버지 이시마루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때 급하게 문이 열리며 이시마루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끌어안고 한동안 떨어지지 못했다. 이시마루와 청아는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그냥 끌어안고만 있었다. 이시마루가 먼저 말을 꺼냈다.

“권번이 폐쇄될 것이오. 미국군이 들어오면 모든 일본군이 체포될 것이오. 더 이상 당신과 마리를 지켜 줄 수 없을 것 같소…”

청아가 손으로 이시마루의 입을 막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저를 꼭 안아 주셔요.”

이시마루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안하오.”

청아가 활짝 웃으며 이시마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당신이 제게 준 딸 마리는 제가 이 세상에서 받은 가장 귀중한 선물입니다. 이시마루가 저한테 미안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산 부인의 품에 있던 마리가 청아와 이시마루의 사이로 와서 둘을 끌어안았다. 청아가 마리를 끌어안아 올리며 말했다.

청아가 박수무당에게 팔려 가던 때 청아의 나이는 5살이었다. 지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이 마리를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자신의 맺힌 한을 풀고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지옥 같은 어두움에서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청아는 생각했다.

“다음 생에서 만나요, 이시마루. 다음 생에는 우리 셋이 이렇게 꼭 끌어안고 같이 이 세상을 살아 봐요.”

청아의 미소와 담담함은 이시마루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은 경성에 있던 일본 관리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떳떳하고 용감한 자살 아니면 죽을 때까지 버티며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성숙함과 미지의 세계의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은 순수한 얼굴로 이시마루를 유혹하던 14살의 청아를 만난 것이 어제의 일만 같았다. 청아를 처음 만나 권번 주인에게 소개시켜 주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만 같았다. 이시마루는 청아와 마리를 안고 계속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시마루는 주머니에서 금목걸이와 금비녀 그리고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꺼내어 청아에게 주며 말했다.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죽을 각오로 투쟁하라는 천황의 명령이 내렸소. 겨우 이 금목걸이와 금비녀를 가지고 왔으니 도망가서 신분을 속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오. 일본 접대 기생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니 이름도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하시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범죄자가 되는 이상한 시절이었다. 어제의 주인이 오늘의 포로가 되는 이상한 세상이었다. 어제의 사랑이 오늘의 헤어짐이 되어야 하는 비극의 시대였다.

청아와 마리 그리고 이시마루는 그렇게 한동안 끌어안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시마루가 청아에게 입을 맞추고 마리를 받아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마리, 엄마를 꼭 지켜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야. 살아남는 사람이 미래의 주인이야, 알았지?”

이시마루는 또 미산 부인을 보며 말했다. “청아와 마리를 부탁합니다.” 미산 부인은 반은 겁에 질려 또 반은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시마루는 마리를 내려놓고 말했다.

“천황을 위해 몸 바쳐 싸워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고는 방을 나갔다.

청아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등을 돌려 방을 나가는 이시마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금비녀와 금목걸이 그리고 루비 반지를 칠두상이 들어 있던 천 주머니에 넣고는 말했다.

“마리를 제게 주어 정말 고맙소, 이시마루… 나에게 살아남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생겼으니… 살아나겠소. 반드시 마리를 지키고 살려 내겠소.”

청아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밖은 짐을 싸서 권번을 나가는 기생들의 고함 소리와 분주함으로 모든 것이 카오스의 상태가 되어 갔다. 그때 방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아일랜드 신부 토마스였다.

“토마스, 여길 어떻게…”

토마스는 신부복을 벗고 일반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바뀌어 버린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토마스는 흥분해 있었다.

“청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청아와 마리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것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청아를 본 그날부터 나의 마음에 계속 들려오는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모르지만 토마스는 전력을 다해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차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몇 년 전에 우연히 미국으로 이민을 간 큰외삼촌과 연락이 되었습니다. 제가 조선에 선교사로 나와 있는 것에 크게 염려하면서 제가 미국으로 가서 큰외삼촌과 같이 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모두 돌아가셨고 큰외삼촌이 유일한 가족이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셔서 연락이 안 됐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제게 연락을 하고 제가 있을 수 있는 집을 마련해 놓았다고 했고 만약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저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겠다고요… 신의 뜻인 것 같습니다. 청아, 저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토마스는 청아를 본 그 순간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신”에 대해 더 큰 문들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신을 돕는 천사가 존재한다면 청아의 목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향기와 발걸음을 가졌을 것이고, 만약 신에 대응하는 악마가 존재한다면 청아가 가진 눈빛과 지혜 그리고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청아의 색기를 가졌을 것이라고 느꼈다. 토마스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지만 청아와의 만남은 신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미산 부인이 청아를 보며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청아가 미산 부인에게 대답했다.

“같이 미국으로 가서 새 삶을 시작하자고 해요.”

“새로운 삶? 신부는 여자랑 살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스님들처럼…”

“저는 여자가 아니고 청아이잖아요.”

청아가 활짝 웃었다.

어쩌면 이것이 청아의 슈퍼 파워라고 미산 부인은 생각했다.

이 판국에 웃음이 나오나…

이 판국에 머리가 저렇게 차갑게 돌아갈 수 있나…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여자 청아는 어쩌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그 모든 것이면서 그 모든 것의 중간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아수라왕이 붙어 다니는 이미 신에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고 미산 부인은 생각했다.

토마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미국 점령단이 인천항에 도착할 것이고 계속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군함 이동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제 친척이 이미 군 사령관과 말을 했다고 하니 상황이 더 난폭해지기 전에 나와 함께 인천항 근처로 가 있읍시다.”

청아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며 급하게 영어로 말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미산 부인이 계속 중얼거렸다.

“신부는 스님들처럼 여자들을 가까이 하면 속세로 빠지는데… 이 사람 왜 이러나…”

청아는 토마스의 손을 잡았다.

“네, 저와 마리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 주셔요. 하지만 미산 부인도 같이 데려가 주셔요. 마리가 새로운 문화에 천천히 적응할 수 있게 미산 부인이 저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세 사람이 미국으로 간다고 했으니 세 사람은 어른을 말하는 것이었고 어린아이 마리가 있다고 하면 들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짐을 빨리 싸서 인천항으로 가 있읍시다.”

갑자기 아군이 적군이 되고 적군이 아군이 되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안 토마스는 한시가 급하게 이 세 여인을 권번에서 빼내어 인천항 근처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아가 조금은 어색하게 천천히 영어로 대답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네 사람은 그 길로 권번을 떠나 인천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발이 내리던 이북의 원산에서 사수(死守)형을 피해 미산 부인과 도망 나온 것이 어제 같았다. 15년이 지난 지금 조선의 주인은 다시 바뀌고 있었다. 15년이 지난 8월, 일본 대제국주의 식민 정부는 다시 미국이라는 대제국에 밀려 조선에서 나가야 했다. 모든 것을 빨리 결정하고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시기였다. 수년을 고민하며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한순간에 결정 나 버리지 않으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던 것이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과 일본이 함께 겪은 역사의 순간이었다.

35도를 넘는 찌는 듯한 여름의 더위 속에 청아는 비녀로 올렸던 머리를 길게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얼굴의 화장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 마리를 안고 다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토마스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갑자기 토마스가 청아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를 어째서 항상 올리고 다녔습니까?”

청아는 이 상황에 자신의 머리를 보고 있던 토마스를 보며 웃었다.

“머리를 올린 여자는 결혼을 한 여자라는 상징입니다. 기생은 결혼한 여자들처럼 항상 머리를 올리고 다닙니다.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남자와 결혼해 주인이 있으면서도 없는 여자… 수녀님들과 비슷하죠?”

기생과 수녀님을 비교하는 청아의 이상한 생각에 토마스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청아,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신비스러운 여인입니다. 아마 마리아 님이 지금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청아와 같은 여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기생을 보고 마리아 님을 떠올렸다고요?”

청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웃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미산 부인은 마리를 꼭 끌어안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부지런한 걸음을 옮겼다. 토마스 신부는 경복궁 뒷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선교사들이 쓰던 목탄차로 청아와 미산 부인 그리고 마리를 데리고 갔다. 인천항으로 가기 위해 목탄차에는 많은 수녀님들과 신부님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탑승해 있었다.

“인천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여인들입니다. 가톨릭교회를 위해 저와 같이 일을 하셨던 여인들입니다. 인천항까지 태워다 주십시오.”

토마스가 영어로 말하자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토마스를 찡그리며 쳐다보았다. 목탄차를 운전하기 위해 고용한 것처럼 보이는 어디 국적인지 알 수 없는 운전자가 말했다.

“세 여자와 어린아이를 더 태울 자리가 없습니다. 어서 신부님만 타십시오.”

대화를 알아들은 청아가 칠두상이 들어 있던 주머니에서 이시마루가 준 금목걸이를 꺼내어 운전자에게 주며 말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쓰십시오.“ 운전자는 금목걸이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말했다.

“귀중한 헌금 잘 쓰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으십시오. 어서 뒤에 자리를 만들어 타십시오. 밑에 천이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여인과 토마스는 목탄차 뒤에 짐처럼 앉아 인천항을 향했다. 군수 물자를 나르기 위해 많은 선박이 오고 가기 시작하던 인천항 근처에 비워져 있던 일본 은행 건물에 그날부터 네 사람은 같이 임시 거처를 만들고 네 사람을 미국까지 데려다 줄 선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없는 영토가 되어 버린 조선의 인천항은 생존의 갈림길이 되어 어수선한 고함 소리와 기계 작동 소리 등으로 분주했지만 새로운 꿈을 꾸는 네 사람은 빈 은행의 안쪽 금고가 있던 방에 침실을 만들고 세상과 격리되어 생활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크게 부자가 되어 있던 토마스의 가족들은 토마스가 무사히 조선 땅을 빠져나와 미국에 도착하는 것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토마스가 설명해 주었다. 이미 미국에 있던 가족과 연락이 된 토마스는 이제 이 세 여인을 데리고 미국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꿈을 꾸고 있었다.

미산 부인이 가지고 온 보따리에 들어 있던 쌀가루와 몇 가지 음식들이 모두 다 떨어지고 네 사람은 이제 어떻게 음식을 구해 선박이 도착한다는 9월 말까지 버텨야 할지 난감했다. 미역과 물만을 마신 것이 이미 이틀이 지났다. 토마스는 매일같이 신부의 일상을 지속하며 은행 건물에서 미사를 드리며 모여서 기도하는 단체를 만들고 있었고 매일같이 마리와 앉아 영어를 가르치며 영어 책을 읽어 주었다.

잔인하게 더운 8월의 해가 어둑어둑 질 무렵 토마스와의 영어 공부를 마친 마리가 청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엄마 너무 배가 고파요. 밥 먹고 싶어.”

청아가 마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엄마도 너무 배고파…”

갑자기 청아의 눈이 번쩍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이시마루가 일본의 공공건물과 은행 건물 안에는 일본군을 위한 비상식량을 항상 저장해 두는 곳이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어요.”

청아는 벌떡 일어나 잠겨져 있던 문들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開門結束(카이몬 켓소쿠, Kaimon Kessoku).” 잠겨져 있던 문들이 열리면서 청아는 빈 방들을 모두 샅샅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멀리 한 방에서 청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토마스는 놀라서 청아가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굳게 잠겨 있던 은행의 가장 뒤편에 있던 창고가 열려 있었고 안에는 건빵, 통조림 등 비상식량이 가득히 있었다. 뒤따라 뛰어온 마리와 미산 부인은 창고 가득히 있는 음식을 보며 팔짝팔짝 뛰었다.

청아는 몇 가지 음식을 꺼내고는 창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閉門封印(헤이몬 후인, Heimon Fuuin)” 이렇게 주문을 외우자 창고의 문이 잠겨 버렸다. 청아가 문고리를 잡고는 또 주문을 외웠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창고 문은 마치 벽처럼 보였다.

토마스와 미산 부인은 넋이 나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고 마리는 청아가 꺼낸 건빵에 정신이 팔려 이 모든 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고 있었다.

청아는 이렇게 건빵을 보고 좋아하는 마리를 보며 자신이 박수무당에게 팔려 갔던 그날을 생각했다.

너무나 배가 고파 숨겨 둔 아버지의 보리밥을 한 숟가락 떠먹은 것에 어미가 화가 나서, 자신의 머리채를 쥐고 박수무당에게 질질 끌고 갔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만약 사내였다면...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나는 배가 덜 고팠을까... 어미는 내게 보리밥 한 숟가락을 주었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밀려왔다. 그때 토마스가 청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요술을 부리는 여자였다면 왜 진작 음식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까?”

“제 마법은 제 생존과 깊이 관계가 있을 때 제 마음속의 가장 아픈 기억들과 연결된 현실에서만 일어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쉬운 말로 신부님이 죽기 살기로 울면서 기도하시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신부가 되어 본 것 중에 가장 신비한 일들이 청아와 함께하는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 속으로 빠져든 1945년 8월 15일. 모든 가치와 신뢰가 모두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선의 땅에서 물러나고 조선은 미국과 소련 그리고 중국이라는 어마어마한 대제국의 야망 속에 다시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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