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
이 글은 사실을 토대로 하였으나, 등장하는 모든 지명과 인명은 소설의 전개를 위해 재구성된 허구임을 밝힙니다.
옛 추억에 깊이 잠겨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가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이 글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1931년 겨울 이북 강원도의 원산에는 너무나도 눈이 많이 내렸다.
고 대감大監 집에는 어젯밤부터 산파産婆 미산부인(未産婦人)이 들어가 종씨를 이을 아들을 기다리는 출산을 돕고 있었다.
강원도 항구 원산 군의 군수(郡守)로 있던 친일파親日派로 일본 군의 식량 조달과 외국 문서를 담당하던 고 대감에겐 자식이 없어 어린 일본여자 하루카가 대리모代理로 아이를 낳고 있었다.
하루카는 고 대감 집에 드나들던 한 일본 행상 쇼베이(庄兵衛 / しょうべえ)의 딸이다.
쇼베이의 부인은 행상으로 돌아다니다가 딸 하루카 (はるか, Haruka)를 갑자기 조산했고 출혈이 멈추지 않아 객사해서 쇼베이는 핏덩어리 하루카를 메고 행상 다니면서 젖 동냥을 하면서 딸을 키웠다
고 대감은 쇼베이가 가지고 오는 일본의 먹과 책들을 사서 썼다.
쇼베이가 갑자기 중병重病이 걸려 (아마도 암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죽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하루카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쇼베이가 고 대감에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새로 나온 책자를 보여주며 말했다.
" 대감 님, 송구스럽지만 소인은 곧 저승으로 갈 몸입니다.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시죠"
" 그게 무슨 소리인가. 빨리 몸을 회복해야지. 자네가 저승을 가면 내 책은 누가 가져다 준단 말인가."
"대감 님 제 얼굴을 보십시오. 이승보다 벌써 저승이 가까운 얼굴 아닙니까... 부탁하나 들어주십시오. 제 딸년 하루카를 부엌 종 년으로 거두어 주십시오. 밥만 주고 잠 잘 자리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 할 것입니다."
쇼베이는 말을 잇기가 힘들듯 숨을 거칠게 쉬었다. 평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이 보이는 쇼베이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며 금방 눈물이라고 흐를 것만 같았다.
“제 딸년이라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마음도 곱고 요리도 정말 잘 한답니다. 서적書籍을 파는 아비를 둬서 읽은 것도 많고 행상을 해서 본 것도 많아 부엌일 맘 놓고 시키셔도 될 것입니다."
15년 넘게 쇼베이에게 물건을 사서 쓰던 고 대감은 쇼베이의 상황이 딱해서 하루카를 맡아 부엌일을 시키기로 했다.
하루카가 10살 때의 일이었다.
하루카를 맡겨놓고 쇼베이는 그 이후로 다시는 고 대감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다른 행상들이 쇼베이가 평양 근처에서 객사 했다고 했다.
머리가 총명하고 말수가 적고 손재주가 좋은 하루카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하루카가 만든 음식과 떡 등은 너무나 예뻐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마다 같이 일하는 하녀들의 얼굴을 장작 나무에 칼로 파내서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카를 유심히 보기 시작한 것은 고 대감의 부인이었다.
고 대감의 본처는 아이를 낳지 못해 고 대감에게 후처後妻를 들여 놓으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책과 글에 빠져 사는 고 대감은 여자들에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 대감의 부인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에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 대감이 가지고 있는 광대한 땅과 집 그리고 하인들을 물려받을 아들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카가 16살이 되던 해 고 대감의 부인은 고 대감의 집안 어르신들과 상의 끝에 하루카를 대리모로 쓰자는 것을 결정했다.
딸 같은 하루카와 잠자리를 하라는 부인의 말에 고 대감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고 대감의 숙모와 이모 할머님… 모든 어른들이 본처의 말대로 해서 후손을 만드는 것이 도리라고 말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본처가 찰떡같이 믿는 청아(靑兒)라는 무당 아이가 틀림없는 옥동자가 나와 집안을 크게 일으키고 자손을 많이 만들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몇 번이나 잠자리를 같이한 40대의 고대감과 16살의 하루카는 결국 임신에 성공했다.
고대감은 15년 동안이나 자신에게 책을 가져다준 고마운 쇼베이에게 못할짓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시든 대를 이으려는 집안의 여인들에게 반항 할 수가 없었다.
1931년 12월 말 16살 꽃다운 하루카가 출산을 하던 그날 강원도 원산에는 끝도 없이 눈발이 날렸다.
이미 24시간 진통을 하며 난산을 하고 있는 하루카의 아직 여인이 차마 되지도 못한 어린 몸은 엉망 진창이 되어 있었다.
" 발부터 나온다니... 큰일이다. 다리만 나오고 아기가 힘을 못쓰고 나 오지를 못하고 저러고 있다니..."
산모도 아이도 지쳐 난산에 난산이 되어버린 피투성이의 출산에 모든 고 대감 집의 하인들과 이웃 사람들 까지 와서 마치 무슨 구경 난 듯 방문 밖에 서서 한 마디 씩 던지고 있었다.
그때 고 대감의 본처가 어린 무당 청아를 데리고 나타나 방문을 열고 난산으로 기절해 있는 하루카를 눈썹을 찡그리면서 징그러운 짐승을 보듯 보며 소리를 질렀다.
" 어서 밑을 찢어 꺼내지 않고 무슨 소란 들이냐"
"마님, 너무 난산이고 아직 양의가 도착하지 않아 밑을 찢으면 출혈이 심해 죽을 것입니다."
" 애미 년은 죽어도 좋으니 어서 아이를 꺼내라"
산파 미산부인(未産婦人)이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시 칼을 촛불에 달구기 시작했다.
“ 용서해 하루카, 천당에 가. 이까짓 세상 살면 뭘 해”
칼이 산모의 몸을 찢는 소리가 산모의 시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피로 난장판이 되고 아이가 나왔다.
산파는 하루카의 몸에 하얀 순 면을 둘려서 피를 멎으려 했다.
하루카는 시체처럼 몸을 전혀 가누지 못했다.
바로 그때 집안의 양 의사 최준이 의사가 도착해 활짝 열려있는 방문을 조용히 닫고는 전쟁터 같은 방안으로 들어왔다.
양 의사 최준이는 동경제국대학 의학부(東京帝國大學醫學部) 에서 독일 식 서양 의학 공부를 하고 원산에 있는 일본 고급 관리와 군대의 주치의로 일하고 있는 젊은 의사였다.
충청북도 청주가 고향인 이 젊은 의사는 고 대감 부인의 먼 친지로 원산의 군수로 있던 고 대감의 조선 총독 부로 보낸 편지 한 장으로 원산 일본 정부의 주치의로 파견됐다.
" 아니 이게 무슨 짓이요. 이렇게 칼질을 해 놓으면..."
피가 온 방에 흥건히 퍼져 나오고 있었고 산모의 얼굴은 이미 마당에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차갑고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명의로 소문난 최준이 의생이 순 면 천 조각을 하루카의 질 언저리에 대고 솟아나오는 피를 막으려 했지만 하루카의 몸은 하체가 벗겨진 채로 사냥꾼이 잡은 사슴을 도축(屠畜) 하고 해체 하는 것 같이 방 바닦에 고깃덩어리 처럼 차갑게 나 뒹굴어져 있었다.
최 의생이 포기 하듯 일어서며 말했다
“ 이런 미련하고 미개한...”
그때 피 범벅이 되어 나온 아기를 방의 한 귀퉁이에서 씻어 천에 싸아온 산파 미산부인(未産婦人)이 바닥에 너 둥거러져 있는 하루카의 벗겨져 피 범벅이 되어 있는 몸을 이불로 덮어 주고는 대감의 부인에게 한 걸음 다가 오며 말했다.
" 마님... 여.. 식입니다. 계집아이가 나왔습니다"
미산부인(未産婦人)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뭐라고... 이런 천하에 쌍 년이...
분기를 참지 못하던 본처는 옆에 있던 어린 무당 청아의 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 이 간을 빼도 시원치 않을 천하에 요시 같은 썅 년. 이년을 데려가 짐승에게 던져라. 산짐승들이 찢어먹게 산골에 묶어 아수형(餓獸刑) 시켜라”
고 대감의 본처가 소리를 지르고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하루카는 난산으로 출혈이 너무 심해 죽고 어린 무당 청아는 산에 묶어두어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아수형(餓獸刑)을 선고 받는다.
산파 미산부인이 아기를 유모에게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 얼마나 기가 센 여아면 사람 둘을 잡고 이 세상을 나왔대…”
방 밖을 서성이던 한 하인이 말했다.
산파 미산부인이 이 사람을 노려보며 피가 뭍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 삼신 할매가 보냈으니 그냥 이 세상에 온 것이지… 어린 몸을 빌려 아들을 만들려고 한 양반들이 사람을 잡는 것이지” 혼자 이렇게 중얼 거리며 자신의 거처로 들어 갔다.
그 다음날 산파 미산부인(未産婦人)은 짐을 싸서 어디론가 없어져 버렸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아마 대감 마님을 피해 어디론 가로 떠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태어난 여식은 고 대감이 거하는 본채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하녀들이 머무는 별채 밖에서 하인들과 유모가 키웠다.
유모가 아이를 안고 고 대감의 본채로 들어간 것은 아이가 태어나고 3달이 지나서야였다.
마당의 진달래와 개나리들이 모두 활짝 피어 봄 향기가 가득한 3월이 되 서야 고 대감은 여식을 본채로 들여오라고 명했다.
고 대감을 본 아기는 활짝 웃었다.
고 대감은 아이를 보고는 자신에게 항상 책을 가져다 주던, 친구 같았던 행상 쇼베이의 웃음을 떠 올렸다.
하지만 찰흙같이 검은 눈과 머리카락 하얀 피부와 야무진 입술 모두 하루카와 꼭 닮은 아기였다.
고 대감은 아이를 받아 안고는 얼굴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여식이지만 사내같이 잘 생겼구먼... 아름다울 미美 에 기쁠 희喜 자를 써라. "
"네, 대감 마님"
이렇게 원산 친일파 지주의 외동딸 고 미희美喜는 남자로 태어나야 할 집에 계집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이 일제 하에 있을 때에 일본인 행상의 딸인 어머니와 한국의 친일파 양반 사이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