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부인(未産婦人)과 무당 청아(靑兒)
이북 강원도 원산 구만산(九萬山)
이 글은 사실을 토대로 하였으나, 등장하는 모든 지명과 인명은 소설의 전개를 위해 재구성된 허구임을 밝힙니다.
옛 추억에 깊이 잠겨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가 간절히 그리워집니다.
이 글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미희가 태어나던 그날 밤, 어린 무당 청아는 고 대감 부인의 아수형(餓獸刑) 명령에 따라 벌거벗겨진 채로 짐승의 밥이 되도록 엄동설한의 밤 구만산(九萬山) 산속 나무에 묶여 있었다.
무당 청아는 다섯 살 때 신이 내려 신병을 자주 앓았다. 이에 어미가 청아를 박수무당에게 주었고, 박수무당이 데려다 키우다가 고 대감 부인의 눈에 띄었다.
열 살 때부터는 대감 부인의 전속 무당이 되어 붙어 다니던 용한 어린 무당이었다.
조선시대 세도들은 대부분 집에 전속 무당을 두었으며, 특히 청아같이 어린 나이에 신이 내린 어린 강신무(降神巫)는 그 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박수무당은 대감 마님께 15원을 받고 열 살 된 어린 무당 청아를 팔았다. 그 당시 쌀 두 가마니의 값이었다.
대감 부인은 조울증(躁鬱症)이 심해 비위를 맞추기 어려워 모두가 피했지만, 유독 무당 청아만은 마치 딸처럼 곁에 두고 모든 일을 상의하며 지냈다.
부인은 청아가 하는 모든 말을 믿었고, 청아는 고 대감 부인을 마치 부처님이 손오공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듯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아는 과거·현재·미래를 꿰뚫는 능력이 있었고, 아무도 풀지 못하는 원한과 저주도 풀 수 있는 용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당 청아가 “이 사람과는 멀리하시오.”라고 하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다고 예언하고 딸이 태어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실수였다.
피투성이 전쟁터 같았던 출산 장소를 나온 산파 미산부인은 짐을 쌌다.
일본군의 잔혹성이 점점 심해지던 시절이었고, 일본의 경제 통제와 자원 수탈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했다. 친일파로 일본군의 군사 식량을 돕는 고 대감 밑에서 더는 머물 수 없었다.
미산부인은 일찍 아이 없이 과부가 된 하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산파인 어머니를 도우며 산파 일을 배워 돈을 모으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원산의 중요한 출산에는 모두 불려 다니던 유명한 산파였다.
아이가 없이 돠부가 되어 모두 미산부인(未産婦人) 이라 불렀다.
미산부인은 짐을 싸고 남장을 한 뒤 산속으로 걸어갔다.
무당 청아가 묶여 있는 곳에 가서 청아를 나무에서 풀어주고 솜옷을 겹겹이 입혔다.
어젯밤부터 내린 눈으로 구만산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영하 10도가 더 되는 추운 밤이었다.
동사 직전이었던 청아는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겨우 열세 살 소녀인 청아는 이미 노인 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고 있었다.
나무에 매달리기 전에 두들겨 맞은 온몸이 아팠다.
“어디 부러진 데는 없어?” 미산부인이 물었다.
“없는 것 같은데…” 몸을 겨우 가누며 청아가 일어섰다.
미산부인은 청아를 숯을 굽던 빈 가마터로 데히고 가서 눕혔다.
“여기서 자고 가자. 그래도 바람이 없고, 해가 달궈 놓은 땅이라 좀 따뜻하지? 불을 피우면 대궐에서 보여서 안 돼.”
미산부인은 청아를 꼭 끌어안아 온기를 주었다.
“지들이 양반이면 다야? 싹 다 지옥에 갈 빌어먹을 양반 새끼들! 나라는 일본에 넘겨주고 쌀은 다 뺏어 쪽바리 군인들 먹여 살리고… 그런데 청아야, 어쩌다가 너 같은 족집게가 아들·딸도 못 맞추었대?”
청아가 조금씩 온기를 되찾으며 말했다.
“너무 기가 센 여인은 음기가 강해서 양기를 다 빨아먹고, 양기처럼 점괘가 나옵니다요. 이런 여인들은 남자들보다 더 큰일을 할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이미 석 달 전에 하루카가 여식을 임신했다는 것을 삼신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 말해 주셨답니다. 그리고 하루카의 여식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도 하셨고요.”
“그럼 청아는 딸이 나올 걸 알았어?”
“네… 그리고 그다음 날 꿈에 칠성님(北斗七星)이 나타나셔서, 벼락 맞은 대추나무 장작에 일곱 개 얼굴을 새겨서 가지고 다니라고 하셨어요.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 일곱 번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 칠도상(七圖像, 일곱 개의 얼굴)을 하루카가 새겨 주어야 한다 하셨고요…”
“아니… 그럼 하루카도 알았어?”
“네… 하루카가 제게 새겨준 일곱 얼굴 상이 들어 있는 천 주머니가 제가 묶여 있던 곳 근처에 떨어져 있을 거예요. 가서 좀 찾아다 주실 수 있나요?”
달빛이 나무 사이로 밝은 조명처럼 비치는 청명한 밤이었다.
미산부인은 눈에 비쳐 밝게 보이는 산길을 돌아, 청아가 묶여 있던 나무 주변을 살폈다.
바로 나무 밑에 붉은색 천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미산부인은 작은 나무 얼굴 조각상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가지고 와 파 놓은 땅속으로 내려갔다.
“여기 있네. 이걸 어떻게 챙겨 왔어?”
“칠성님 말씀대로 항상 옷 속에 지녀 왔지요. 제 옷을 벗기고 묶은 게 송씨거든요.
제가 마지막 소원으로 그 주머니를 손에 쥐고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더니 손에 쥐어 주시더군요.”
“아아… 송씨면 청아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송씨?”
“네… 끈도 느슨하게 묶어줄 테니 풀고 도망가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짐승에게 먹힌 것처럼 보이게 돼지 피를 뿌려 놓으라고, 피가 들어 있는 작은 항아리 하나도 옆 나뭇가지 위에 매달아 두고 가버렸어요.”
“그랬구먼… 역시 억눌려 사는 사람은 같은 처지 사람을 이해한다니까… 아이고 빌어먹을 세상…”
청아가 비웃듯 미산부인을 보았다.
“미산부인은 답답하게 아직도 송씨가 이해해서 도와준 거라 생각하시오?”
청아는 노인 같은 표정으로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송씨 거시기를 적어도 반 시간은 빨아주고, 정사(情事)도 해주었지요. 옷을 찢고 때리면서 계속 좆대가리를 제 입에 꾸겨 넣어서 하라는 대로 다 해줬습니다. 이 세상엔 공짜는 없는 걸 아직도 모르신가요?”
열세 살 청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하고 침을 퉤 뱉었다.
미산부인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청아를 한참 바라보았다.
“쪼마난 것이… 너는 월경은 들었어?”
“아직 안 들었습니다.”
“남정네들이 만지게 처음 아니지?”
청아는 물끄러미 생각에 잠기듯 미산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이란 것이 있을 때부터 박수무당과 잠자리를 했지요.”
미산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개 같은 남정네들… 나는 다음 세상엔 한번 남정네로 태어나 보고 싶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요 며칠 천주학쟁이 따라가서 이야기를 좀 들었는데… 예수란 사람이 그랬대. 착한 마음 먹고 서로 도와주면 여자고 남자고 다 천당 갈 수 있대. 천당은 양반도 없고 상놈도 없고, 여자도 남자도 구분이 없다더라.”
온기를 되찾고 정신이 맑아진 청아는 또렷또렷한 눈으로 미산부인의 말을 듣고 말했다.
무당 청아도 천주학쟁이들의 말에 관심을 두고 있던 터였다. 천주학쟁이들은 한국 양반도 아니고 일본 제국도 아니고, 예수의 말을 따른다고도 들었다.
“예수는 사내랍니까? 아님 계집이랍니까?” 청아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예수는 사내였지…”
청아는 웃음을 참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사내 말을 미산부인은 믿습니까?”
미산부인도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사내 말은 못 믿어.”
두 사람은 서로 기대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