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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찬 Nov 01. 2024

*처가의 폭망

맥스웰 몰츠의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처가의 폭망

나는 벤츠 500E을 운전하는  최기사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뒷자리, 짙은 갈색 가죽 사이트에 앉아 계신 장인께서 운전수 옆좌석이 앉아 있던 나에게 물어보신다. 

       “박서방 요즘 자네 회산  좀 어떤가?”

 나는 대답을 했다.

      “괜찮습니다.”

이 얘기는 미루위 보면 내 직장이 맘에 드냐는 질문이면서 나에게 자신의 회사도 염두에 두라는  장인의 물음이었다. 장인은 그 당시 대한민국의 수출을 주도하던 수출 전문업체 회장님이셨고, 나는 그 당시 대기업의 잘 나는 부서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장인께서 하시던 말을 이어 가셨다.

    “ 좀 잘 좀 배워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우리 회사를 자주 들먹이는 이런 대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 질문엔 “나는 항상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 나는 사실 장인의 회사는 전혀 내 맘에 두지 않았다. 장인어르신 회사는 미국 체인업체에 수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대화 중에서도  그 속으로 장인께서 자기 회사에 나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장인어른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하더라도  장인어른의 회사보다 훨씬 큰 대기업에 다녔던 나는 젊었기에 더 큰 조직문화에 익숙하고 싶었다. 그래서 막상 비록 흙수저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런 제안은 나에겐 별로였다.  그래도 은근한 이런 말에 기대는 아니더라도 한참 나이에 성공하고픈  젊은 청년 앞에  초이스가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 생각했었다. 더도 덜도 없었다.  그런 대답을 주고받은 그때에 최기사님이  급하게 죄회전을 아주 큰 원을 그리면서 했다. 500E, 벤츠 차가 뭔가 날아오는 걸 피하듯이 큰 반원을 그리며 급 좌회전을 하고 있다는 걸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전방에 있던 빌딩이 사라지고 그다음 빌딩으로 급작스럽게 나타나고 있어서 이 정도  빠른 속도면 차가 뒤집어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이 될 정도이었다.  그런데  운전사와 나 사이에 있던 커피잔의 커피가  쏟아지지도 않았고, 커피잔의 커피가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이었다. 짙은 가죽시티에서 나오는 새 가죽냄새가 내 코를 스치고, 내 몸은 창문 쪽으로 쓰려 움츠려있을 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 돈이 좋긴 좋구먼.”

 또 다른 시간 때에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갔다. 내가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내 옷을 매만지면서 동생인 영업이사한테 그것도 그냥 잘하라는 말이 아니라 친절하게 잘하라는 말을 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동생인  이사한테 잘해야지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것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었지만 기분이 상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장인의 회사에 나를 기대주로 넣고 있다 정도로 생각을 했다. 나쁘진 않았기에 그냥 마음의 한 끝에 새겼다. 

마지막으로 아내 될 사람은 시집올 때 키를 세 개나 가져온 여자였다. 아내는 돈을 많이 들여서 시집을 왔다. 처갓집에서 그 귀하디 귀한 딸이 시집가신다니까 돈을 물 쓰든이 써서 귀하디 귀한 혼숫감을 준비해서 보냈나?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아내가 될 사람은 그 집에서도  아주 당당하고 큰소릴 칠 만한 그런 위치였나? 싶기도 했다. 

이 세 가지를 빗대어 보면 이런 주변의 상황이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은근하게 일련의 감을 잡기엔 충분한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똑똑하게끔 사전에 명확한 선을 그어야 했다. 나는 흙수저로 자란 열등감에만 충만해서 떵떵거리며 잘 나가는 처가랑 쌈만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데릴사위처럼 허황한 부에 끌려다니는 결혼 생활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이런 처가 집안 때문에 횡재할 건가? 보단 “내가  벌어 놓은 돈은 나보다 부자인 이 집안에 안 처넣겠구나”라는 중간 타협점을 찾아냈다. 이 절충안이 만들어지자 드디어 내가 셑팅한 마지노선이 처가랑 연루된 어떤 말이나 어떤 제스처에도 날 편하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처갓집의 힘을 입어 출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전혀 없었다. 내 가족은 내가 벌어서 먹여 살리고 내 능력으로도 장인보다 더 큰 회살 만들 수 있다는 자신까지도 충만했던 아주 패기만만한 나이었다.  그러나 단 내가 싫었던 것은 내가 벌어 놓은 걸 처갓집에 대준다는 건 썩 마음에 드는 일도 아니고 원하는 봐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말이 오고 갈 땐 차라리  잘 되었다란 안도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실상은  바라던 마지막 마지노선이 하루아침에 와인 유리잔이 바위 위에서 산산조각이 나듯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그 두 개의 핵폭탄이 한 시간 간격으로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그 핵폭탄은 지상에서 터진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졌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장인이 하는 회사는 크고 작은 소형비즈니스까지 합쳐서 열댓 개 정도였는데 가장 큰 회사가 미국의 전국 체인망을 자랑하는 스테이플러에 단독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다. 미국 스테이플러는  미국 이외도 전 세계 전역의 판매망을 가지고 있었던 회사였고 그 미국 회사에 독점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니 땅 짚고 수영하듯이 장래가 꽤 있는 회사였다. 한창 대한민국이 수출 주도형 회사를 지원하던 80년대엔 아주 탄탄대로의 비즈니스였다.  바인더이며, 몇몇 주요 문구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였는데 보통 수출하는 회사들은  L/C를 열고 했다. L/C라는 것은 자기 돈이 들어가지 않고, 그 L/C를 여는 순간부터 결국 은행 빚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인데 이런 회사는 현금확보액( 캐시플로우; cashflow)가 회사운영 핵심이었다. 아뿔싸!  이거를 맡았던  친구가 장인어르신의 친척이었는데  이 친구가 캐시플로우를 제대로 운영을 못하고 있었다.  친척이라고 고용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맥만으로 고용되어 있었기에 제대로  진짜로 실력 있는 직원을 고용한 적이 없던 희귀한 회사였다. 그러니 이런 사달이 나는 경우에도 이 친구가 집에서 잠을 잘 주무시고  부도난 회살 일하려나 나오는 수준들이었다. 회사는 벌써 도산되었는데도 말이다.

 지나서 보니까  6개월 안에 두 사람이 결혼했다. 아내인 딸고 그 밑에 남자인 처남이 결혼했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았지만 그 당시 중소기업들은 밑에 있는 벽돌 빼서 윗에 올리는 식의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 돈이 회사 운영자금이었다.  내가 결혼 후 뒤 후에 2-3개월도 안 돼서 지금 남동생인 그 당시 영업 이사라는 처남이  결혼을 했다. 우리가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남동생이 결혼할 여자가 이미 임신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니  혼전임신이니~  뭐니~ 자존심 강하고, 사회적 위신을 중시하던 가족이 주변의 가십이 될 소지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나이 가득 찬 큰 딸 서둘러 결혼하게끔  딸에게 압력을 주었던 것이었다.  밑에서 밀고 올라오니까 아내가 나를 선정했던 것이고 그러니 따지고 무를 짬도 없이  바로 결혼에 골인한 것이었다. 순진한 나는  불빛에 비친 나에게 혼이 빠져서 결혼할 줄 착각하고 있었다. 참! 말이지 나의 착각으로 나의 못되고 헛된 자만심만 풍만해 있던 셈이었다. 내가 장동근처럼 잘 생겨서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 아님을 알았고 드디어 정신이란 걸 차려보니 이것이 모든 일체유심조였다.  이렇게 착각엔 국경도 체면의 경계선도 없었다. 내가 날 생각해 보아도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해서 정신 차려 계산해 보니까 딸과 아들 결혼식에 거의 10억 이상의 자금을 썼던 것이었다. 그 당시 회사에 1,000억의 자산 가치이고 실 운영가치는 500억이 있었는데 운영자산가치  4%에 들어가는 캐시플로우는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0.5%의 차이로 회사가 기우뚱거릴 그런 회사운영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 자산의 4%,  20억이 한꺼번에 100일 사이에 빠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업이사, 처남이 공수표를 발행했고 발행된 수표 한 개가  펑크가 나버렸다. 이 정도면 죽어가는 회사을 아예 밧줄에다 매다는 수준이었다. 직접 내사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어서 그 속내를 속 속하 알 순 없지만 참으로 내가 일하던 대기업에선 생각지도 못하는 무지막지한 일을 이 친척끼리 운영하는 회사에선 대책 없는 자들에 의해서 대책 없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장의 어음을 막질 못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은행조차 체납사간을 연장해 주질 않았다. 이 이유는 은행도  호의를 줄필요가 없었던 것이 이 회사가 회사 사냥꾼들에겐 노른자였고  현금을 만드는 사업체였다. 이런 일로 은행은 손실 볼 일이 없었고, 장인회사도 수출전용회사였으면 정부와 인맥이라도 있었어야 했었는데 사실 대형교회의 선교회장은 하셨어도 정치와는 거리가 머셨기에  빼도 박도 못한 상황에서 도울자는 세상천지 아무도 없었다. 어디든지 누구 하나 바쳐줄 곳이  전혀 없었던 이런 기업을 기업 사냥꾼이 그냥 놯둘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이건 그들의 밥이었다.  주 기업이 도산을 했고 옆에 있던 작은 작은 비즈니스도  매장까지 하루에 하나씩 날아갔다. 그러니 이게 어떤 일인지 한꺼번에 공중에서 핵폭탄이 11개가 터져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처갓집 가족이 회생할 확률은 극히 낮았고, 안타깝게도 거기서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까지 함께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나 회장님인 장인과 장모님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이 회사는 친척들의 담보로  다 물려 있었다. 장인과 처남이 하는 기업이 이렇게 되고 있을 이때쯤에 나는 이들과 정 반대로 너무 잘 나가고 있었다. 

    공교롭게 나는 대기업을 너무 잘 다녔고, 구미공단 프로젝트 과장 대리로 일년전에 발령받아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프로젝트의 전반을 관리했었는데  그 어렵다던 프로젝크를 제때 끝을 내고, 그 공헌을 인정받아서  과장으로 막 진급하고 나서 서울로 재 발령을 받는 후였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효율적으로 마무리해내는 장점이 있었고 이런 단기성 프로젴트는 여러 번 참여한 경험도 있었다.  일을 성공적으로 잘 끝을 내고  극도로 심한 경쟁 속에서도 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많은 내 동기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영광스럽게 서울로 금의환향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과장 진급과  서울 발령으로 회사 동례들과  함께 회식하고 했었는데 지금 처갓집이 이런 사달이 났다. 지금 내 위이 계신 연구소장은 나랑 거의 나이가 20년 차이가 있으니 선배였다.  그리고 부장님이 한 분 더 있었는데 소장님과 2,3살 차이였다. 그러면 연구소장 자리는 나한테 보장이 되어 있는 자리였다. 그 회식자리에서 나오고 있던 나는 이런 보장된 상황에서 처갓집을 구원하겠다고 모든 걸 내 손에서 떨구어야 했다. 그리고 갑자기 지금 미국을 가야 하다니?

? 미국을 가야 되냐?,   왜?  가는데… 왜 나야 했나? , 왜? 지금이어야 하나,  이 절묘한 시간에?  이 상황이 오합지졸이 되고 내 머리는 텀블링이 되는데…… 어쨌든 장인 어르신께서는 폭망 한 다음에 해외로 피신하셨다. 그러니까 지금 장인의 회사는 다 풍지박살이 된 상태였고, 회사의 투자자들은 졸지에 빚쟁이로 변했고, 경찰이면 인터폴까지 가동되어 전 세계를 뒤지다고 날리 북쇠통이었던  그때에  장인은 미국에 가 계셨는데 미국에서 이 스트레스를 못 이기시고 결국 반신불구가 되셨다. 이게 지금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께선  대우그룹가  폭망한 후엔  베트남에서 그 훌륭한 책까지 집필했다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장인 어르신에도 있어지만 김우중 전 회장만큼 뱃심이 세지 못하셨던 장인 어르신은 병까지 얻고 사지를 못쓰시게 되었다. 

    막내로 살아와서 형이고 누이고 날 위해서 양보하는 걸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아왔던 난데 지금은  특히 장인을 위해서 살신성인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앞으로 내가 내려할 결정에  후회하지도 않을 자신이 선득 나질 않았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자신들을 살신성인하면서 보살핌을 받아 온 내가 눈먼 심봉사를 위해서 심청이가 돼야 되는 것인데  참 어려웠다. 난 한 번도 심청이란 역할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날 아는 게 하나 있었다.  이성적으로 가능치 않은데? 나의 감성적으로 끊지 못하는 무엇이 내 안에 있었다. 장인어른이 몸이 성치 않게 되었다는 것에는 내가 아무리 이성적이려해도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내 안에 강하게 저항하는 힘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 친아버지도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실제 나는 부모가 이미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성보다 이런 감정을 더 중요했었고 인연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난 외면하지 못했다. 내 부모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살아야 할 막내, 나를 염려해서 하늘이 정하여 처갓집 부모로 대치시켜 주웠다면 나는 이 혼잡한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이 외면만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이쯤 되어 있을 땐 나는 이미 주사위를 루비콘 강 위로 던지고 이었다. 

 사람을 절대 버리지 못했다. 버리지 못하는 걸 꺾어서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이 사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똑같이 장인어르신이  이렇게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이성적으로는 절대 아닌데 히면서도 감성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처가 폭망에 같이 블랙홀에 빨려 차츰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은 손과실의 계산문제처럼 풀 수 없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결국 나의 기저가 깔려있던 성정이 나를 프로그램된 유도장치에 의해서 인도하고 있었다. 그 참담한 이 결정에  나는 마치 불구덩이 안으로 타 죽을 줄 알면서 서서히 들어갔다. 이게 의리였나? 어째든지 그런 기분이었지만 이쪽이 내가 선택해아 할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분골쇄신이 되더라고 그 길로 들어 서야 했다. 이런 결정을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논리적이지도  못 한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내 친형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날 끔찍이 사랑하던 친누나는 “내내 결혼을 잘못해서  동생을 미국으로 뺏겠네”라고 울고 있었고 누이가 흘리는 눈물에 나의 희생이 예시되는 듯 보여서 나에겐  위로가 되었다.  

    어느 정도 맘먹고 미국에 들어왔다지만   들어와서 폭망 한 그 상황을  보고 다시 한번 더 놀랐다.  생각보다 더 참혹했다. 참 암담했다.  왜 그날, 놀랐던 그날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까? 돌이켜  생각해 본다.  깨달은 것이 있었다.  결혼식이나 회식자리는 너무 성대하면 가역 하기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  갈 때 너무 크게 회식하고 너무 잘난 척 해대고 떠나다 보니 돌아오기 힘들었다. 나는 연구소에서 앞이 창창한 사원과 경쟁해서 초고속 진급을 했고,  그다음에 내가 유일하게 그때 우리 동기 중에 이미 석사 학위자였다. 그러니 그다음에 보장은 연구소장인데 그 자릴에서 포기하고 나올 때 내 동기들은 나를 굉장히 축하해 줬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그 친구들이 찬스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얼마나 벅쩍지든하게 축제를 하고 난리를 쳤는데 내가 빈털이로 돌아온단 사실이 내 자존심을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그 한창 젊었을 때 자존심이 최상일 그때에 내가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을까? 혼자서 생각해 보지만 아마 감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이 학교를 2년간  월반하고도 아는 체하면서 학교 다닌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장인어르신은 중풍이 걸려서 한 발을 땅에 끌면서 뉴욕 한복판 사람이 쏠려 다니는 비좁은 길거리 한구석에서 간신히 서서 좌판장사, 페들러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 어럽고 힘든 상황인데 싸들고 나 혼자 돌아온다? 난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뒷머리 벅 벅 끌어대면서 돌아간다면 나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어야 할 죄를 평생 스스로가  용서하지 않았을 거였다.  억지라도 폭망 한  이걸 다시 끄려 올려놯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을 때 장모님께서 비상금으로 남겨 놓았던 돈이 있는 걸 아시고 뉴욕 길바닥에 뿌려서 마지막 비즈니스를 하자고 꼬드겼고 그 대면 대면하신 장모님의 한마디가 부글부글 거리는 내 몸에 불을 질러 댔던 거였다. 

그래서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왜 학교로 가야 되는지? 공부가 좋아서 인지? 가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그때의 최선책은 그 작은 터널 끝의 조그마한 빛인 학교로 돌아가서  제2의 찬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음을 위해서 학업을 선택했고 이 선택엔 후회가 없었고, 군말없이 준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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