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구쓰범프

회사를 은퇴함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어느덧 3년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조만간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긴 시간 동안 나는 회사 소속으로 살았고, 은퇴 이후에도 곧바로 학생 신분으로 나의 ‘소속’은 끊어지지 않았다.


학위 논문을 최종 제출한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묘한 공백이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일이면 일, 논문이면 논문으로 꽉 차 있던 시간들 속에서 살다가 아침에 눈을 떠도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이제 자유를 누리면 된다고 알려주었지만, 그마저도 적응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모든 하루를 스스로 감당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조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왔다.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조직의 일원인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가 곧 나의 정체성처럼 여겨졌다. 조직 안에서 역할을 다했고, 그 역할에 맞는 언어와 태도를 익히며 살아왔다.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시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소속이 사라진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가?”


은퇴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드라마처럼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매일이 특별한 깨달음으로 채워지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변화들이 생긴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사람을 만나는 기준이 달라지며, 하루를 평가하는 잣대가 바뀐다. 예전에는 ‘무엇을 성과로 남겼는지’를 묻던 하루가, 이제는‘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돌아보는 하루가 된다.


이 연재는 대단한 인생 2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공적인 은퇴 모델을 제시하려는 글도 아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한 사람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배우고, 때로는 흔들리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조직을 떠났지만 여전히 공부를 하고, 일에 대한 미련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어쩌면 이 글은 은퇴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조직 안에 있으면서도 이미 마음은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 소속은 있지만 소속감은 옅어진 사람, 언젠가 맞이하게 될 ‘그 이후’를 막연히 상상해 보는 사람들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에도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제는 내 하루와 선택에 대해, 변명할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 글들은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한 작은 일기장이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어디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하루도,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