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정리하니 관계가 소중해졌다.
연초에 신년회를 하자고 연락이 오거나, 내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한 일이 몇 개 있다. 그러다 보니 1월 저녁 식사 일정이 가득 차 버렸다. 약속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어 줄여볼 요량으로 하나하나 체크를 해 보았지만, 딱히 줄일 방도가 없는 모임들이다.
이번 기회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한번 분류해 보기로 했다. 보통 은퇴를 하면 사람관계를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와 친분을 유지하는 데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든다.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감정 소모까지 감당해야 하니 정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선호와 상관없이 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도 많아서 다 소화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의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과 앞으로 계속 만날 사람을 나눠 볼 필요가 생긴다. 어쩌면 은퇴 후 1, 2년 사이가 사람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이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사 가기 전에 해묵은 물건을 정리하고 가뿐한 세간살이로 새 집에 들어가듯,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점에 굳이 오래 가져갈 인연이 아니라면 자연스러운 이별을 택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이때 어떤 사람과 관계를 종료하고 누구와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는 철저히 나의 감정과 이성에 따르는 게 맞다.
# 1. 나는 은퇴 이후 한동안 학업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먼저 연락을 못하고 지낸 경우가 많았다.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하다 보니 '은둔해 버렸냐'는 소리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내게 먼저 연락을 준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들과는 아무리 바빠도 1년에 서너 차례 만남을 이어왔다. 이런 관계는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은퇴한 나를 만나도 되고 안 만나도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연락을 주고 만나 준 사람들이다. 고맙기도 하고 진심이 느껴지니 안 만날 이유가 없다.
# 2. 작년 초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고, 그동안 보고 싶었어도 연락을 못했거나,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 소원했던 이유도 전달하고 앞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그 만남 이후, 먼저 연락이 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보고 싶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다. 그런 사람에게는 더 이상 연락을 취해 부담을 주지는 않기로 했다. 다시 말해 가는 사람 안 붙잡고, 오는 사람 안 말리는 태도라고나 할까.
# 3. 그동안 상대방에게서도 연락이 없고 나도 연락할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굳이 이제 와서 연락을 취할 마음이 없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회사라는 매개체가 있어서 이어진 관계이지, 서로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매개체와 함께 관계도 바람처럼 소멸되는 경우다.
# 4. 회사를 나와 사회에서 만난 인연들이 있다. 나이 차이도 있고 오랜 만남을 한 것도 아닌데, 의외로 정이가고 배울 것도 많아서 내가 먼저 다가가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상대의 반응도 살피면서 말이다. 짧은 만남, 긴 인연이 될 소지가 있다.
# 5. 과거 직장 동료들의 단체 모임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거북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너무 얼굴을 안 보이면 자기들을 멀리하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간히 얼굴을 비치고 온다. 가더라도 가까운 사람과 주로 붙어 앉아 있다 오게 되지만, 이런 모임과 관계 또한 완전히 연을 끊을 수는 없다. 젊음을 같이 보낸 동료들이고 사회의 친구들이니 이들과의 관계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나섰지만 생각과 달리 아직도 만나야 할 사람이 꽤 남아있다. 자연스럽게 잊히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정리가 안 되는 관계가 있다. 인연을 의도적으로 끊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A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현직에 있을 때도 어떤 날은 저녁에 두 탕을 뛰던 사람이다. 그는 남들에게 밥 사주고 얘기 나누고 도움 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나 싶을 정도로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 오죽하면 그의 아내가 "저 사람에게 밥 사주는 거 좀 줄이라고 하면 아마 미쳐버릴 거야"라고 할 정도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만남 자체가 큰 의미다.
반면 B는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가족과의 오붓한 삶으로 노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서 겪는 갈등과 부조화가 부담되어 독립을 택했는데 "지금이 너무 좋다"라고 한다. 남과 자신을 비교할 일도, 남 때문에 상처받을 상황도 줄어드니 나름 현명한 대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 둘의 중간쯤 자리를 잡기로 결정한다.
나이를 먹고 고정적인 사회생활에서 멀어지면서, 인간관계의 폭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들게 되고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폭이 줄어들면 감정소모를 겪을 가능성이 적고 오히려 관계가 깊어져, 줄어든 폭을 상쇄시키고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지내기가 만만치 않은 사회적 동물이다. 때로는 남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모르던 정보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며, 더 나은 삶의 지혜를 배우기도 한다. 게다가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는 경우까지 종종 생기는 것을 보면 너무 관계를 끊고 지내기보다 마음을 열고 대하는 태도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른 쪽을 보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적당한 거리 두기와 적당한 손해 보기를 사람관계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착하고 현명하고 배려심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을 만나 하나라도 인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나도 상대도 굳이 연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조용히 삭제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 사람으로 인해 마음 끓일 시간에 귀중한 사람들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관계가 더 소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