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 내 PC에서 ‘디지털 텃밭’이 사라진다

HBM 목초지를 독점한 빅테크, 8비트 퀀타이즈로 연명하는 디스토피아.

by Sasirim

요즘 RAM이랑 SSD 가격표를 보고 있으면 빅테크가 설계한 잔인한 보드게임판에 던져진 기분이다. 이제 저장공간은 '디지털 신분증'이 되어 버릴 지경이다. 16GB는 간신히 숨만 쉬는 평민증, 32GB는 말이라도 한 필 끄는 기사 작위, 8TB NVMe 기본장착에, 80기가 짜리 NVIDIA DGX Spark 정도는 탑재해야 어디 가서 ‘영주님’ 소리 들으며 거들먹거릴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다. 어느새 디지털 소작농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이 비극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예언서 대로 정말 비슷하게 굴러간다. 중세 영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뜯어냈듯, 현대의 실리콘 영주들은 반도체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 우리의 '로컬 소유권'을 박살 내려 든다. 내 손안에 쥐어야 할 저장장치를 빼앗긴 우리는 결국 놈들의 구름(Cloud) 속으로 기어 들어가 다달이 '디지털 호흡세'를 바쳐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16세기 영국 지주들이 양을 키우겠다고 농민들을 쫓아내며 울타리를 쳤던 '인클로저 운동'이 2025년 데이터 센터에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놈들은 자기네 AI 상전들을 먹여 살릴 HBM 목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가 쓸 반도체에 거대한 울타리를 쳤다. 우리가 누려야 할 실리콘의 축복은 이제 놈들의 서버실 안에서만 허락되는 특권이 되어간다.


미래의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암울하게 상상했던, 하지만 색채만큼은 화려했던 사이버펑크와는 거리가 좀 멀지 싶다. 로컬에서 인공지능 로라(LoRA) 하나 학습시킬 '디지털 텃밭'이 없어서, API비용을 써 가면서 정량제 인공지능을 빌려다 써야 하는 상황 말이다. 이 정도면 중국의 오픈소스 진영이 빅테크 제국에 맞선 새로운 저항군으로 둔갑해 보일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미래를 좀 더 확장해 보자. 새로운 귀족은 HBM15 칩을 뇌에 박고 빛의 속도로 세상의 정보들을 섭렵하는 동안, 디지털 서민층은 당근마켓으로 구형 칩셋을 구매해서 8비트 정도로 퀀타이즈 된 오픈소스 모델을 취향에 맞게 장착하는 풍경 말이다. 돈 없는 사람은 그냥 펌웨어 업데이트나 겨우 할 수 있는 그런 풍경. 내 망상이 너무 나갔나?


‘지능의 민주화’라는 놈들의 구호는 사실 ‘노예의 표준화’에 불과한 것인지도.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다 줬더니, 제우스가 그 불 앞에 계량기를 달고 벼락(전기)으로 시간당 구독료를 받는 격이다. 더욱 커다란 문제는, 이놈의 램 가격이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점점 품귀화 될 것 같은 내 빈곤한 상상력 때문에 64GB짜리 램을 지금이라도 사서 업그레이드 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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