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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농 Oct 23. 2021

일터에서 만난 연인. (1/2)

치과대학생 커플의 이색 데이트.

환자가 왼손을 든다. 여자 친구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석션"

 "커커커걱(물 빨려 들어가는 소리)"


 뭔가 제대로 안 보이는지 여자 친구는 계속 고개와 몸을 움직이며, 치과 기구들이 환자의 입안에서 이리저리 방황한다. 

"라이트 바꿔주세요!" 

 급하게 오른손을 들어 라이트를 잡고 여자 친구가 잘 보일 수 있는 각도를 빠르게 계산한다.

"찾았다. 최고의 각도!" 

 축구 경기에서 일류 스트라이커는 수비수들이 골대 앞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더라도, 그 사이를 기가 막히게 통과해 골 대안에 꽂힐 수 있는 틈을 본다고 한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월드 클래스 스트라이커다. 여러 장애물들에 막히지 않고 여자 친구가 보고자 하는 곳을 밝게 비출수 있는 위치로 라이트 각도를 바꿔준다. 

내심 '아! 라이트 각도 미쳤다. 목구멍까지 다 보이겠네' 


 그런데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여자 친구의 움직임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확보되는 시야가 성에 안찼는지 그녀는 치료를 멈추고 한 손에 들고 있던 기구를 내려놓은 후 라이트 위치를 재조정한다. 약간의 오기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려고 할 때 주문을 외친다. 

 '쫌생아! 이건 진료야!'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들이 있는데, 치과대학 원내생 진료실이 그런 경우다. 나 역시 치과대학 입학 전까지는 본과 3학년을 올라가면 환자를 직접 치료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못 했다. 요즘 들어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근황을 이야기할 때 환자를 치료한다고 수줍게 말하면 되돌아오는 질문 중 하나가 

"너 혼자 치료해?"이다.  

 

 반은 맞는 말이다. 아니지. 33.3% 맞는 소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우리는 아직 치과의사 면허가 없기 때문에 슈퍼바이저 교수님들의 지도 하에 술식들을 진행해야 한다. 그러니까 교수님께 지분 33.3% 드리도록 하자. 잠깐만. 생각해보니 '지도 하에'라는 말이 너무 광범위하다. 나중에 지도 교수님들과의 해프닝들을 적는 기회가 분명 있을 건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교수님들은 히어로 같은 존재다. 평화로운 고담시에는 배트맨의 입지가 좁지만 악당이 나타나면 배트맨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처럼, 교수님은 치료과정 중 갑자기 출몰하는 치과 대학생의 무식과 무능이라는 악당으로부터 빛이 되어 우리를 바른길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표현하니까 지분을 더 드려야 할 것 같지만, 교수님이 나와 여자 친구 진료 씬에서 배트맨으로 등장한 경우는 많지 않으니 공평하게 33.3%만 드려도 무방할 듯하다. 내가 1/3, 교수님이 1/3 가져갔으면, 나머지 1/3은 누가 가져갈까? 


 치과치료는 보통 4 hands technique이라 불린다. 삼손도 아니고 사(4) 손이다. 손 네 개의 출처를 찾아보자면 치료를 주관하는 술자가 손 2개를 담당한다. 그리고 술자의 맞은편에서 환자 입안에 있는 물을 빨아들이고(석션이라고 한다) 동굴 같은 입안에 라이트를 맞춰 술자의 시야 확보를 돕는 어시스트가 손 2개를 제공한다. 여기에서부터 벌써 술자 각자의 진료 성향이 보인다. 특히 어시스트를 대하는 술자의 태도는 가지각색인데, 일단 나는 어시스트와의 궁합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누가 어시스트로 들어와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 여자 친구는 다르다. 나보다 훨씬 섬세하고 완벽을 기하는 성격이기에 대체로 신뢰 가는 사람을 어시스트로 삼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은 웬만해선 어시스트로 부르지 않는다. 참고로 여자 친구 진료의 최다 어시스트 기록자는 '나'다. 


 왜일까? 내가 여자 친구의 진료 중 마음을 잘 헤아려서? 혹은 어시스트를 잘해서일까? 어쩌면 앞선 두 가지가 아니라 기쁜 일도, 힘든 일도 함께 나누자 했던 우리의 맹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참, 우린 아직 성혼선언문을 읽진 않았어 이 맹세는 한 적이 없다. 예전에 함께 산책하며 나 혼자 속으로 다짐한 걸 착각했다. 아무튼, 우리 둘은 술자-어시스트를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진료실에서도 데이트하냐고 놀리는 주변 동기들이 많다. 


 맞다. 데이트라면 데이트다. 치과대학 cc만 느껴볼 수 있는 아주 이색적이고 위험한 데이트다. 여자 친구에게 내뱉은 애정 어린 조언이 순식간에 눈치 없는 충고가 되는 현장이 바로 일터 즉 진료실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만난 연인.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드라마 같은 데이트. 일터에서 만난 연인 (2/2)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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