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를 다시 만나고 싶어 #1

by 보통의 건축가

2017.7.26

아기 고양이 '포도'를 만나다.

지난 일요일, 비 오는 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할 만큼 내리는 오후에 윤기가 아내와 나를 다급하게 부른다.

지가 부르는 엄마, 아빠 소리는 점점 커지는 줄은 모르고 연신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란다.

윤기가 가리키는 창가를 보니 누런 뭉텅이가 보인다. 살살 다가가 보니 아기 고양이가 창턱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를 맞아서 비루먹은 몰골에 비쩍 마른 조그만 놈이다.

아내가 이놈을 보더니 알은 체를 한다.

얼마 전부터 부엌 창가에서 이놈이 뒷마당을 어슬렁거리고 툇마루에서 자고 하는 장면을 목격했더라고.

이 말을 하는 와중에 요놈은 경계심이 발동했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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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잊고 있었다.

빤스까지 젖을 만큼 더운 오늘.

좀 일찍 일을 끝내고 집에 와 널브러져 있는데, 어디서 야옹~ 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마음에 창 밖을 보니 포도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턱이 없지만, 그 비루먹은 모습에 '배고프다 밥 좀 주라'하는 소리로 들린다.

냉장고 속 먹다 남은 고기 몇 점을 구워 뒷마당으로 살짝 나가봤다.

살살 다가가니 경계를 하던 놈이 쏜살같이 툇마루 밑으로 도망간다.

뭐, 살갑게 맞아 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툇마루 앞 풀밭에 고기 몇 점을 놔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 냉큼 다가가 정신없이 먹는다.


길냥이가 보통 그렇듯, 이렇게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집 밖에 사는 냥이와는 불쌍해 밥을 몇 번 챙겨주는 선에서 그냥 냥이와 내 삶은 별 상관없이 흘러갈 거라 생각했다.

요때까지는 말이다.


일은 늦은 밤 분리수거를 하러 나서는 길에 벌어졌다.

재활용 쓰레기를 차에 싣고(이 동네는 분리수거하는 곳이 멀어 차로 이동해야 한다) 막 차에 타려는데, 또 야옹~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궁금도 해서 '야옹아~'하고 부르니, 포도나무 덩굴이 드리운 뒷문 위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쳐다본다.





밤에 노란 조명을 받으니 조명빨인지 아이가 너무 귀엽다. 손을 내밀면 도망갈 줄 알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요놈이 담을 타고 내려와서는 내 몸에 지몸을 비빈다.

밥 한번 줬다고 무장해제해버린 건가.

아님, 너무도 밤이 무섭고 외로워서였을까.

아내가 내게 이 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해 준다.

어제, 포도넝쿨이 너무 늘어져 가지를 치다가 문위에 있던 이 놈이랑 마주쳤다는 것이다.
어미가 어디 갔는지, 같이 살다가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건지, 이 놈은 먹을 것도 없는 이 마당에서 숨죽이고 포도나무 덩굴에 숨고, 툇마루 밑에 몸을 숨기며 살아왔었나 보다.
아까 사 온 고양이 사료 한 캔을 따 주었더니 코를 박고 먹는다.

난 아무래도 이 놈에게 간택된 모양이다.

조만간 이 놈의 먹이 한 포대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같이 사는 이 놈에게 이름을 붙여 주기로 한다.

포도나무 아래에서 산다 하여 '포도'

포도, 잘 부탁한다.


2017.9.23

내 집은 우주

포도와 조우 한지 두 달, 이제는 마당에 느긋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면 불안하고 허전하다.

보이지 않아 급하게 부를라치면 툇마루 아래, 매실나무 위, 철쭉나무 아래에서 졸고 있던 녀석이 금방 달려오곤 한다.

밥 주고 놀아주는 집사로 완전히 받아들인 모습이다.

내가 출근하고 없을 낮시간의 행적이 궁금해 아내에게 슬쩍 물어 보니, 이 아인 심심할 틈이 없어 보인단다.

동네 냥아치 친구들이 마실오고(나도 본적이 있다. 뚱뚱하고 덩치가 큰 누런 점박이친구와 까만 점이 있는 쬐그만 놈이다), 풀밭의 귀뚜라미와 메뚜기를 참으로 즐기고, 물고기 장난감과 질리도록 물고 뜯고 논다는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항아리 속 지 아지트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단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온갖 것들이 살고 있는 마당에서 우리 눈에는 지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바삐 사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다 지쳐 잠들고..

내 사는 모습과 슬쩍 겹처 보이기도 한다.

밤마다 창가에 앉아 나오기를 청하는 ‘야옹’ 소리를 그래서 외면하기 어렵다.

막상 나가면 온전히 다 기대지도 않으면서, 곁을 다 주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나오라하나 모르겠다.

마룬이(댕댕이)의 스트레스가 날로 심해진다.

새로운 걱정거리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내 모습을 첩질하는 망나니 남편을 기다리는 서글픈 본처마냥 바라보기도 하고,

빨랑 안 돌아오면 가만 안두겠다며 바가지 긁는 소리를 해대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퇴근하고 돌아와 잠깐 포도와 놀아 줄때는 별채로 데리고 들어 간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한 곳으로.

바람 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땅을 딛고 사니, 땅을 딛고 사는 나 이외의 존재들과 함께 사는 세월을 보낸다.

일년 정도를 함께 했던 닭 다섯마리, 옆집 스피치 솜이, 그리고 마룬이와 포도.

작은 내집과 내마당은 그들에겐 세상이고 우주일 터이다.

그들에게 만족스런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이른 아침부터 마룬이를 산책시키고, 포도에겐 낚시로 무료함을 달래주고,

집지키느라 열일하고 뛰댕기는 솜이에겐 간식을 챙겨 준다.


그러고나서야 우리 사람 식구들, 아침 한술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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