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를 다시 만나고 싶어 #2

by 보통의 건축가

2017.12.21

길냥이의 죽음

별채 툇마루 아래에 냥이가 죽어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얼어 죽었을 거라는 아내의 추측에 마음이 너무 안 좋다.

겨울에 얼어 죽는 길냥이가 많다고 해서 툇마루 아래 바람이 잘 들지 않는 곳에 박스와 보온재로 꾸며 놓은 자린데, 하필 그곳에서 동사라니.


퇴근해 날이 너무 어두워 아침 해 뜰 무렵에 가보니, 툇마루 아래 잠자듯 누워 있는 아이가 보인다.

낯이 익다.
포도와 옆집 보름이 와 똑같아 어미가 아닐까 의심했던 냥이 었다.
팔을 옆으로 길게 뻗고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다.
제발 동사가 아니라 늙어 죽었길...




뒷산에 언 땅을 파고 냥이를 묻었다.

내가 삽질하는 동안 아내는 십자가를 만들었다.
아내의 십자가는 어설프고 내 구덩이는 얕았다.
언 땅에 묻으니 맘이 더 안 좋다.


툇마루 냥이 쉼터를 폐쇄해 버렸다.

박스는 태워 버렸다.

냥이의 죽음이 내 탓인 것만 같아서.






2017.12.31

두 해의 보드라운 경계

하루가 가면 달력 한 장 바뀔 뿐 뭐가 달라질 게 있겠냐마는

오늘의 눈은 열두 달의 쌓인 후회와 흠집 같은 상처와 실수를 덮어 준 듯 포근하다.

시루떡의 켜와 같이 내년에도 또 같은 실수, 상처를 남기겠지만 뭔가 일 년을 마무리할 틈이 생긴 것 같아, 아침부터 눈을 밟으며 아내와 일 년을 되돌아본다.

오늘은 좀 느긋하게 일 년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채워야겠다.

그나저나 마룬이 와 포도는 함께 보낸 시간만큼 거리도 많이 좁혀졌다.

내년 산책 길엔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비벼대기도 하며,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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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14

불을 피웠다.

너무 추워 별채 출입을 자제하다가

a형 독감인 아들의 격리를 위해 별채로 쫓겨났다.

누가 격리된 거니?

뒷산에서 나무를 주워다 난로에 불을 지폈다.

검댕이 묻은 동그란 창에 불길이 인다.

온기가 말을 거니 맘이 아른아른하다.

포도야. 너도 그런 거니?

겨울날 별채의 낭만을 잠시 잊고 있었다.

lp를 틀고 포도와 난 잠시 나른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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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10

본의 아닌 임신중절

중성화 수술은 다행히 별 탈 없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임신 중이었다 하는데, 본의 아니게 중절을 해버린 결과가 돼버렸다.

좀 짠하고 미안하네.

고깔 쓰고 일주일을 다용도실에 갇혀 산 게 안쓰러워 마당에 내놨더니 기분이 좋은 듯 계속 그르릉거린다.

아프고 무서웠을 텐데 티 안 내고 견딘 거 보면 엄살쟁이 마룬이 와 비교되게 어른스럽다.

우리 같이 오래 살자. 포도.


2018.4.1

걷기에 좋은 날

해가 쨍하지 않아서

걷기에 좋은 날이다.

바람도 세지 않고 너무 건조하지도 않다.

우중충한 날씨의 좋은 측면을 보니, 산책 길이 나쁘지 않다.

일주일을 고대하고 기다렸을 마룬이 와 포도는

이 산책을 느긋하게 즐긴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누이같이 살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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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귀에서 만난 살구나무에 꽃이 만개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무슨 꽃인지 맞춰보라 했더니, 다들 헛다리다.

매화 아니면 벚꽃.

뭐 나도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셋이 닮아 있다.

가장 쉬운 구별은 꽃잎보다는 꽃받침을 보고 구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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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매화로 꽃받침이 붉고 끝이 동그랗다.

살구꽃은 꽃받침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접혀있고 벚꽃은 녹색에 뾰족하게 생긴 꽃받침이 있다.

사 년 동안 걷기를 통해 얻게 된 잡스런 지식이다.

냉이를 구별하고 논두렁에서 돌미나리를 찾아내고

길가다 눈에 띄는 풀이 돼지감자인 것에 반가울 수 있는 것이 이 느긋한 산책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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