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소년이 중앙 테이블 옆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을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재밌니? 아직 어려서 만화책 보는구나"
소년은 손에 들려있던 <소년중앙>을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얼굴만 빨개지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게 그냥 만화책은 아닌데..'
소년보다 두 살 많은 진은 그런 식으로 소년을 꼬맹이 취급한다.
얼마 전 등굣길에서 마주쳤을 때는 큰 소리로
"안녕~코흘리개~" 하며 스쳐 지나간 적도 있다
'아니 ..감기가 걸려서 그런 건데..'
왜 꼭 이럴 때만 나타나지?..
미술을 전공해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진은 이번에도
그렇게 소년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미술 관련 서적들이 있는 곳에서
해가 꼼짝 않고 책만 보고 있다.
그녀의 고정된 눈동자는 몇 년 전 처음 마주쳤을 때 입고 있었던 재킷의 커다란 단추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소년은 생각에 잠긴다
'음.. 미술서적과 소년중앙을 가까이 배치해야겠어...'
그렇게 혼자 샐쭉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정리하다가 슬쩍 진을 돌아보니
그녀는 책장 모서리 한 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다
갸름한 턱 선을 살짝 덮은 단발머리 때문에
어디가 아파서 지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이 또 자는구나, 하하"
등 뒤에서 음성이 들린다.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언제 들어오셨는지 아버지가 카운터 쪽에서 빙그레 웃고계신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 틈에 잠에서 깬 진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그래, 진이는 이번 시험도 1등했다며?"
"아,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책은 가져가거라"
"네?"
"1등 선물이까 가져가"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방금 전까지 환자처럼 졸고있던 진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뭐 별로 재미도 없어보이는 책이 그리 좋다고.. '
소년은 혼자 중얼거리며
진을 따라 밖으로나와 집 쪽으로 같이 걸어가며
생각해본다
'그래도 어쨌든 아버지가 서점을 하시게 된건
참 잘된 일이야.
이렇게 진과 매일 같이 걸어가게 되었으니.'
거리의 쇼윈도 안쪽 TV에선 청룡과 베어스의
프로야구 경기가 나오고 있었지만
소년은 그것보다 이렇게 진과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