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도 비다:
나의 로컬브랜딩 철학

- 진짜 브랜딩은 꽃이 아니라 토양을 가꾸는 일이다

by 토양지기 Soil Keeper


여름날 오후,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날 때가 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등장,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굵은 빗방울, 순식간에 거리를 점령하는 위세.

소나기는 극적이고 화려하다.

모두가 소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강렬한 존재감을 기억한다. 하지만 소나기가 그친 뒤엔 무엇이 남을까.

파인 아스팔트, 꺾인 나뭇가지, 쓸려 내려간 흙먼지, 강렬한 만큼 상처도 깊다.


이른 봄, 온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는 어떤가. 존재조차 희미해 알아채는 이 드물고, 누구도 그 비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 하지만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이고, 잠든 씨앗을 깨우는 것은 요란한 소나기가 아니라 바로 이 묵묵한 보슬비다.

대학의 관광연구자로서 지난 10년간 강원 18개 시군, 20개 넘는 축제와 10여 개 전통시장의 브랜딩 현장을 누비며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소나기 같은 성공만을 기다려온 것은 아닐까.

내가 몸담고 있는 로컬브랜딩의 세계 역시 소나기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더 높은 랜드마크, 더 화려한 미디어 파사드, 더 자극적인 축제. 모두가 도시의 ‘꽃’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실제로 지자체 관광 예산의 상당 부분이 상위 10% 랜드마크와 대형 행사에 치중되는 것이 현실이다. 도시의 나머지 90%는 배경처럼 소외되곤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 툇마루에 앉아 흙마당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요란한 소나기가 지나간 뒤엔 늘 지렁이가 기어 나오고 흙탕물이 고였지만, 소리 없는 보슬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엔 어김없이 작은 풀꽃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을 진짜로 살리는 힘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이렇듯 이름 없는 것들의 묵묵함에 있다는 것을.
진짜 브랜딩은 꽃을 치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토양을 건강하게 만드는 지혜여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정의하는 ‘보슬비 브랜딩’은 외치는 대신 경청하고, 만드는 대신 발견하며, 지배하는 대신 연결하는 활동이다.


도시의 가장 낮은 곳,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그들이 가진 고유한 힘이 스스로 싹을 틔우도록 돕는 일이다.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나기 같은 화려한 뉴스를 뒤로하고, 도시의 오래된 골목에서 들려오는 보슬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안에 도시의 진짜 얼굴과 지속가능한 미래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는 강원 18개 시군을 누비며 발견한 문화예술, 축제, 음식, 시장, 사람 속에 숨어 있는 ‘보슬비 같은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진짜인, 크지 않지만 단단한, 로컬의 보슬비 같은 이야기들을 함께 발견해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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