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된 목소리들,
춘천의 토양이 되다

- 가장 완벽한 아마추어리즘에 대하여

by 토양지기 Soil Keeper


몇 해 전 늦가을, 춘천의 한 작은 연습실이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이며 잔잔한 울림을 냈다. 창문 틈 사이로 옅은 햇살이 스며들었고, 사람들의 숨소리가 공기 속에 부드럽게 섞여 있었다.

무대 위에는 낯익은 동네 아저씨부터 앳된 청년까지, 육십여 명의 남자들이 어색하게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지휘자의 손끝이 공기를 가르자, 피아노 반주가 잔잔히 흐르고, 이내 그들의 입에서 노래가 퍼져 나왔다.


프로 성악가의 완벽한 화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조금 높은음을 냈고, 누군가는 한 박자 늦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투박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고, 서툴렀지만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날 내가 들은 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그들이 함께 쌓아온시간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나는 춘천의 한 시민 합창단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1986년 창단, 어느새 40년. 3대를 이어온 시간이다.

단원 60여 명, 연평균 10여 회의 공연, 누적 관객 수만 명. 그러나 이 숫자들은 사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단원들은 성악가가 아니다. 은퇴한 교장 선생, 동네 편의점 사장, 현직 공무원,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20대 청년까지. 그들은 그저 ‘노래가 좋아서’ 매주 저녁마다 한자리에 모이는, 춘천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원로 단원 한 분께 합창단이 40년 넘게 이어진 비결을 여쭈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노래를 맞추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맞춰가는 겁니다.” "옆 사람이 숨이 차면 같이 쉬어가고, 기쁜 일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주지요. 그러다 보니 40년이 흘렀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합창단의 진짜 가치는 '음악'이 아니라 '시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툰 화음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해 온 공동체의 증거였고, 동시에 춘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진솔한 '토양'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세상이 '프로'와 '최고'를 외칠 때, 이들은 '함께'와 '꾸준함'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다.

무대 위의 화려한 스타는 없지만, 무대 아래에서 서로의 삶을 오래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찾던 가장 완벽한 아마추어리즘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춘천의 이 합창단은 도시가 품고 있는 수많은 '보슬비' 중 하나일 뿐이다. 화려한 무대나 스포트라이트 없이도,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묵묵히 노래를 부르며 도시의 토양을 단단하게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요란한 소나기 같은 대형 공연은 한 번 휩쓸고 지나가지만, 이들의 보슬비 같은 노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도시의 깊은 지층을 적셔왔다. 그것이 4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다.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도시의 골목에도 이처럼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누구에게는 소소한 취미로 보일지 모르지만,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꽃'이 아니라 ‘토양을 가꾸는 사람들’에 가깝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한 도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도시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이렇게 오래 버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보슬비처럼 스며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당신의 도시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전 05화프랜차이즈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37년의 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