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람은 뒷담화를 안 할 거라는 착각 -
< '하얼빈' 영화를 보았다. >
안중근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감동이 배가 되었다. 마치 그가 쓴 일기장을 훔쳐본 듯 자책으로 가득한 고뇌(苦惱)가 가슴에 와닿는다. 안중근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죽은 동지들의 목숨 값으로 산다는 두려움과 슬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결점 많은 선량한 조선의 청년으로 그려진다.
영화 하얼빈에서는 1908년 함경북도 신하산 전투에 포로로 잡은 일본군의 소좌 '모리 다쓰오'(박훈)를 전쟁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 제3협약'에 따라 놓아주고 포로였던 일본군 모리는 다시 돌아와 광복군을 궤멸시키게 된다. 안중군은 광복군 사이에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選擇)을 해야 한다. 사소하던 중요하던 매일 해야 하는 선택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그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 안중근은 모든 일본인에게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해 복수가 아닌 자신의 신념인 '용서(容恕)'와 '화해(和解)'의 메시지를 선택하였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와 당시 모든 일본인은 전쟁으로 나라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 될 것이라는 광기와 집착(執着)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런데 사피엔스 이토 히로부미가 한 말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야.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나라를 망쳤다. 거기에 비해 나는 3년 만에 조선을 이만큼 발전시켰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류의 통합'이 생각난다. 제국이라는 인류의 통합이 우리 민족에게 강제 근대화라는 작은 썩은 사탕을 준 반면 나라를 빼앗긴 치욕적인 수모와 백성 모두가 받은 고통과 수많은 순국선열의 희생을 초래한 잊을 수 없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는 굴욕적인 사건이 되었다.
2025 을사년 초에 나를 성찰(省察)하고 인간이란 존재의 본성(本性)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러기에 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내가 선택한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사피엔스를 읽기 시작하니 손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 도대체 사피엔스는 왜 그럴까? >
인간은 왜 정당(政黨)을 만들어 서로 분열하고, 인간의 왜 전쟁(戰爭)하고, 인간은 종교(宗敎)라는 개념을 만들어 서로 모이고, 남자들이 축구에 열광하는지, 왜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지... 인간의 본성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Sapiens'를 읽고 나니 사피엔스의 특성이 조금씩 보인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능력을 타고난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통해 자신과 같은 편을 만들어내고 농업혁명으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였고 돈과 제국 그리고 종교를 만들어 인류를 통합하였다. 태생적으로 뒷담화에 능한 사피엔스의 DNA를 가진 우리 인간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사피엔스를 읽고...>
인지 혁명에서는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하려면 사실상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 주었다. 누가 신뢰 할 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47 page)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여섯 종의 인간(네안데르탈, 호모사피엔스 등) 이 동시대에 살았고, 그중 한 종인 사피엔스는 나머지 다섯 종을 무참히 살해한, 형제 살인범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사피엔스가 '뒷담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인간이 존재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 허구인 것을 믿게 하는 인지 혁명을 통해 조직력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도 이런 사례는 종종 발견할 수 있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뒷담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피엔스라는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뒷담화를 통해 서로 같은 생각을 공유하며 ‘정당’이라는 집단을 만들고, 또한 다른 종의 인간을 멸종시켰듯이 같은 종의 인간도 멸종시킬 수 있는 전쟁의 본능을 타고난 것이다.
농업혁명에서는
”농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다. 일부에서는 그 덕분에 인류가 번영과 진보의 길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파멸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사피엔스가 자연과의 긴밀한 공생을 내던지고 탐욕과 소외를 향해 달려간 일대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148 page)
인류는 농업의 시작으로 노동에 얽매이게 되었고, 농업혁명을 통해 인간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농업이 심각한 영향의 불균형을 초래했고, 농사를 위한 가축화로 인해 수많은 질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기술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농업혁명은 인간 역사의 최대 사기극으로 보고 있다.
특히 소, 돼지, 닭과 같은 가축들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장 성공한 종(種)이지만 이와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동물들이 되어 버렸다. 내가 다시 태어나 보니 2000년대의 어느 시대에 소나 돼지나 닭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가정해 보니 참 끔찍한 일이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구슬 같은 땀을 흘리는 농부가 되었고, 그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으며,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었다.
인류의 통합을 보면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제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246 page)
지구상 유례없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있어 작용한 인간의 상상력으로 ‘돈’, ‘제국’, ‘종교’를 꼽는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류를 대통합할 수 있게 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특히 인도를 '대영제국의 자식'이라고 말하며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뒤섞여 전쟁을 벌이며 혼란스럽게 지내던 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공통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하나의 정치단위로 기능하는 국가를 창조해 냈다고 한다. 사법제도의 초석을 놓았으며, 행정부 구조를 창건했고 철도망을 건설했다고 한다. 과연 인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을 이토 히로부미는 새로운 국가로 개혁시켰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종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진 하라리는 불교에 대해 언급도 하고 있다. 서양의 종교와 달리 불교의 중심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본성으로 집착(執着)과 번뇌(煩惱)가 생겨나고 집착으로 반응하면 항상 불만을 낳는다. 삶은 극심하고 무의미한 생존경쟁이며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 인간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적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에서 일어난다. 그 해답은 명상이라고 말한다.
과학 혁명에 관하여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과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399 page)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나 연인에게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행복은 오로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나온다. ” (544 page)
지난 500년간 인간의 힘은 경이적으로 커졌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 유럽의 발전은 과학 혁명으로 이어졌고 뒷담화라는 인지 혁명을 통해 서로 뭉친 사피엔스가 농업혁명으로 번식에 성공하고, 돈과 제국, 종교로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더니 이제는 과학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물질적, 과학적 성과만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돈으로 생명연장의 꿈을 이룰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죽음만은 공평하다는 믿음이 무너져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욱 불행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호모 사피엔스(지성)’에서 ‘호모 데우스(신)’가 되고자 한다고 했다.
신의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던, 탄생과 죽음까지 관장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핵무기의 발명과 제작, 생명 연장을 위한 동물실험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으로 사피엔스가 현재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다고 시사하며 그런 사피엔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할 질문이라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표지사진 설명: 남해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길 쌍홍문이다. 멀리 남해바다 절경이 보인다. 퇴직한 4명의 사피엔스는 매주 수요일 인근의 산에 등산을 다닌다. 4명은 사피엔스가 모여서 활동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숫자이다. 차를 타거나 음식을 먹거나 서로 의견을 모으기에 가장 적당한 숫자이다. 과학적 연구결과 1명의 사피엔스가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 규모는 약 150명까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