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코미디였고, 이제 막 공연이 끝났습니다."
숲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내일 산불지역에서 민간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격려하기 위해 간식을 준비해서 방문하려고 합니다. 선생님도 함께 참석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모두가 힘든 시간인데 의미 있는 일이고 봉사하는 일이라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내일 중요한 선약이 2군데나 잡혀있어 참석할 수가 없었다. 대신 전해달라면서 위로금을 보냈다.
전화를 받는 시간에 나는 지리산 화엄사에 있었다. 화엄사에서 사사자 삼층석탑(국보)에 삼배를 올리고 세 가지 소원을 빌어보았다. 석등 속의 인물은 화엄사 창건자인 연기조사이며 석탑 속의 인물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는 해석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오늘 비가 와서 산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해 주시옵고,
둘째, 맑은 정신이 있는 동안 브런치 스토리 글쓰기의 열정이 식지 않게 해 주시옵고,
셋째, 만일 내가 절망 속에 빠지는 날이 오더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대학 다니던 시절 80년대 초 영미시 특강이란 과목이 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는 언제나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상적인 강의를 하셨다.
한 번은 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멸의 진리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떤 묘비명을 남길지를 생각하면서 살면 현재의 삶이 더 알차게 살아진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단어가 죽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50대인 교수님과 20대의 우리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어떤 묘비명을 남길까?
나는 어떤 인사말로 나의 마지막을 준비할까?
정신이 맑을 때 가족을 위한 작별인사를 준비해 볼까?
너무 앞서가는 것인가??
지난주에는 내가 눈 검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다니는 대구 안과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판사보다 더 중요한 결론을 내려주신다.
"눈 관리가 잘 되고 있습니다. 6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이 한마디는 향후 6개월 동안 내 눈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축복의 메시지이다. 내 오른 눈의 시력생명이 6개월 연장되었고 브런치 스토리를 6개월 더 쓰도 되는 중요한 선고이다. 그런데 왼쪽 눈에도 망막 주름이 생기고 있어 오른쪽처럼 진행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의욕이 좀 떨어진다.
"이제부터 눈에 해로운 브런치 스토리 글쓰기도 접어야 하나?" "컴퓨터 오랫동안 보는 습관도 고쳐야 하나?" "만일 왼쪽 눈에도 망막주름이 생겨 시야가 흐리면 어떤 상황이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운전핸들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나는 오른쪽 눈으로는 컴퓨터 자판을 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운전도 불편하다. 그래도 왼쪽 눈이 있으니 한쪽 눈이 없으면 왼쪽눈으로 생활하면 되지 하면서 긍정의 마인더로 살아가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왼쪽 눈에서도 망막주름이 진행되고 있다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왼쪽에 망막 주름이 생겨 양쪽이 다 망막주름현상이 생긴다면 브런치 스토리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인사를 미리 쓰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1년에 한 번씩,
만약 내일 내가 죽는 다면...
첫째, 장례식에 오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만 받아주세요.
둘째, 나의 시신은 화장하고 유골은 문수암과 보현암사이 산길에 뿌려주세요.
셋째, 아들아~ 딸아~ 혼자 남겨질 어머니를 잘 돌보아 주세요.
나는 화장을 하고 유골은 산에 뿌리기 때문에 묘비명은 없다. 우리 부부는 유골을 뿌리기로 했다.
대신 나의 장례식장에 <나의 마지막 인사> 시를 읽어주세요. 그리고 유골을 뿌린 장소에서 <나의 마지막 인사>를 읽어주세요.
< 호세리살의 마지막 인사 >
1896년 12월 30일, 일단의 소총 부대 앞에 한 작달막한 남자가 섰다. 몇 분 뒤면 총살을 당할 운명의 그는 죄수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죄수가 아니며 정당한 일을 했을 뿐이니 정장을 입겠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아울러 총을 치켜드는 군인들 앞에서 그는 돌아서서 등을 보인다. 총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앞을 보고 서면 죽으면서 당신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느니 내 조국 품에 안겨 죽는 것이 낫다." 뒤돌아선 그의 등에 총알이 퍼부어지고 남자는 쓰러져 숨을 거둔다. 필리핀의 국가적 영웅 호세 리잘의 최후였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심성 고운 의사였고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었다. 그는 때로 총독에게 자신의 자유를 청원하기도 했고 해외에 나가겠노라 요청하기도 했다. 무장 투쟁에 가담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필리핀 민중을 사랑했고 뻔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곳에 억지로 돌아왔으며 남국의 태양처럼 밝게 웃음을 터뜨리는 필리핀 아이들을 사랑했고, 스페인 당국의 수탈에 허덕이는 필리핀 인민들을 부둥켜 일으켰다. 그것은 죽을 죄목이었다.
죽어가기 전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필리핀인들에 의해 애송되는 일종의 국민시(詩)다. '마지막 인사'라는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이다.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기꺼이 바치리니
중략
감사하노라. 잘 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즐거움 함께했던 친구들이여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1890년 12월 30일 호세 리잘은 조국의 땅을 품으며 쓰러진다. 한 번도 무장해 본 적 없던, 누구를 공격한 적도 없던, 하지만 압박받는 동포들을 통분해하며 작은 주먹을 부르쥐었던 의사는 그 죽음으로 독립 투쟁의 불씨가 되고 봉화가 되고 들불이 된다. 그의 죽음에 분격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인들에 저항하여 일어서고 그들은 독립을 쟁취한다. 물론 그 짧은 기쁨은 미국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긴 하지만.
조국과 민중을 사랑했던 호세 리살의 마지막 인사에서 나의 마지막 인사를 정리하여 보았다.
나의 장례식장에 이 시를 읽어주세요.
< 나의 마지막 인사 >
먼 훗날 잡초 무성한 산길에
애처로운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영혼에 입 맞추듯 입 맞추어다오
그러면 차가운 산길 속
나의 눈썹 사이에
당신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숨소리
느끼게 되리니
작은 새 한 마리
내 산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으면
내 영혼 위해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해 다오
뜨거운 태양으로 빗방울 증발시켜
나의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게 해 다오
너무 이른 내 죽음을 슬퍼해다오
내 편히 하늘나라에 쉬도록 기도해 다오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가족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하늘나라로 가노라
잘 있거라,
아쉬움 남아 있는
나의 인생이여
사랑하는 여인이여
나의 가족들이여
감사하노라.
잘 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딸이여
즐거움 함께했던 아내여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감사하노라.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표지사진 설명: 2025년 3월 다시 찾은 거제의 공곶이와 천주교 순례길에서 발견한 하얀 동백꽃, 순수하고 맑아 우리 민족의 혼을 닮았다고 느꼈다. 나의 영혼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을 닮은 것 같았다.
어떤 봄날 거제도 동백
동백은 피어서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개별자로 피어나는 그 꽃들은
제가끔 피어서,
제가끔 떨어진다.
절정에서 바로 추락해 버린다.
그래서 동백이 떨어진 나뭇가지에는 이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없다.
뜨거운 애욕의 정념 혹은 어떤 고결한 영혼처럼. -김훈, 자전거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