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는 작게 보이지만 큰일이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왜 그럴까?
작지만 큰일, 크지만 작을 일
20220825 - 김상국 경희대 명예교수
내 자식들은 가끔 나에게 핀잔을 준다. 때론 과잉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빠가 하는 것은 과잉반응이 아니라 ‘미래를 더 생각해서’ 라고 말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대학교 교수이기 때문에 나쁜 직업병이 하나있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교육과 연결시키는 버릇이다. 남에게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가족들에게는 좀 귀찮은가 보다. 교육은 아무래도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관련 있는 것이 많다.
몇 가지 최근 예를 들어 보겠다.
∙보행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는데 그것을 흘낏 쳐다보고도 그냥 천천히 걷는 사람.
∙좌회전을 하기 위해 차의 속도를 줄이고 좌회전 선에 섰는데 빵하며 지나는 사람.
∙요즈음은 전기모패드를 많이 타는 것 같다. 나도 한번 시도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제는 보행도로의 한가운데 또는 도로에서 두세자 정도 도로 중심 쪽으로 팽개쳐져 있는 모패드다. 이것은 우리 아파트에 있는 일이므로 같은 사람이 반복적으로 하는 것 같다.
∙집 앞 도로에서 30Km 정주행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빵빵 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홱 지나면서 욕을 해댄다. 그 날은 나도 화가 나서 길가에 서로 차를 세웠다. 그러자 내 차 사진을 찍는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그 사람 번호판을 찍었다. 그러자 아무 말도 횡하고 도망쳐 버린다. 그런데 그 차안에는 부인과 두 아이가 타고 있었다.
다 작을 일들이다. 그냥 지나쳐도 아무 문제없는 일이다. 나이 들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일들이다. 나도 99%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오늘 이런 글을 쓰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속 생각을 적어 보겠다.
∙보행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천천히 걷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했을 때 당연히 느껴야 할 미안해하는 감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남에 대한 배려 정신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차의 속도를 줄였는데 ‘빵’하고 지나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매우 단순한 사람이다. 운전할 수 있는 성년이 되었음에도 그 사람은 그 ‘순간’ 자기에게 불편한가, 편리한가, 나에게 즉각적인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가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람이다.
∙전기 모패드를 도로 한가운데 놓아두고 가는 사람이다. 아마 비교적 어린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이 사람은 좌회전 시 ‘빵’하며 가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다. 즉각적 눈앞에 있는 것이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어린애라면 부모의 교육에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집앞 도로에서 30Km 정주행을 하는데 화를 내고 사진을 찍고, 나도 사진을 찍자 도망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매우 나쁜 케이스다. 첫째; 법의식이 없다. 나도 30km 속도 제한에 정말 짜증이 난다. 오죽했으면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교통정책』이라는 글을 썻을까! 이런 제목의 글을 한번 더 쓸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도 이런 한심한 교통규칙에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의 과속 욕구를 남이 만족시켜주지 않는다고 남에게 화까지 내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너무 지나친 사람이다.
또한 이 사람은 책임감도 부족하다고 보인다. 어떻게 자기 동네 앞에서 자기 부인과 자식들이 타고 있는 차에서 그런 추한 모습을 ‘가장(家長)’으로써 보인다는 것인가? 이런 행동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였다면 무식한 행동이다. 그러나 자기 가족들이 있는데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부모로써 무책임한 행동에 더 가깝다.
그리고 또한 비겁한 사람이다. 자기가 사진을 찍었으면 당당한 모습이어야지, 나도 사진을 찍으니까 어찌 도망을 가는가? 항상 남에게 겁을 주면 움츠리는 것을 보왔거나 또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면 설령 내가 틀렸을지라도 상대방이 양보하는 것을 많이 보고 재미를 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지금까지 지적한 것들은 다 작은 일들이다. 그냥 지나가도 아무 일 없다. 오히려 점잖은 사람이라고 칭찬받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나의 상상력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이 들어 생각하면 우리 옛 속담이 짧지만 어찌 그리 인생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말인지 감탄할 때가 많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 “사람은 나이 들면 변하기 어렵다.” 등등
내가 내 자식들로부터 핀잔을 받지만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내 나이도 벌써 고희가 되었다.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것이 우리 세대가 끝나고 난 다음 세대의 우리나라 미래다. 나는 이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우리나라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미중일소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겪은 그런 끔찍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되어야 할까?』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이 나라의 흥망성쇠는 절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내부로부터 온다. 그것도 장래를 책임질 젊은이들로부터 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심, 열심인 마음,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의 배양』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대로 어렸을 때 특히 초등학교 가기 이전에 형성되는 것 같다. 즉 타고 난 것도 중요하지만 어렸을 때의 가정교육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수없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 “콩 하나라도 나눠먹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이런 소리를 듣고 사는가?
(착하게 사는 것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을 위한 기막힌 전략이라는 것을 다음 기회에 써 보겠다.)
게다가 미래에는 인간을 대신할 수없이 많은 기술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더 빠르게 더 많이 개발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로봇트, 다양한 자동화 기술, 부품 숫자를 줄이는 수많은 기술 등등
지금까지 신기술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직장(기회)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미래의 신기술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나를 두렵게 한다. 왜냐하면 새로 발견되는 기술들은 인간의 영역을 『넓혀』 주는 것 보다,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엘론 머스크의 의견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신기술에 대한 많은 우려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에는 그 우려가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 두렵다.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세대는 바로 이런 환경이다. 여기서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떤 실력을 쌓아야 할까? 어떻게 인생을 대하는 자세여야 할까? 그리고 우리 자식들을, 우리 후손들을 우리는 어떻게 키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