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건 세계를 활보하는 일_윤가은<세계의 주인>

영화 리뷰/ 영화 평론

by 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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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쌍의 고등학생 남,녀가 활활 타오르는 듯 키스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에서 한 번 꺾어 세계가 아닌 주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등학생 소녀 ‘이주인’(서수빈)은 이 이야기 속 세계의 주인공이다. 가장 처음 관객에게 긴장을 주는 장면은 바로 반장 수호(김정식)-주인이 맞붙는 장면일 것이다. 수호는 과거 소아 성폭력범이 형을 마치고 다시 이 동네로 돌아온다는 뉴스를 듣고 반대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주인과 부딪친다. 주인은 수호가 작성한 서명문의 문구가 잘못되었다며 화를 내고 그 과정에서 반 친구들 뿐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도 큰 파도를 일게 하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단순히 피해자의 성장기 혹은 극복기 정도로 치부하기에 이 영화는 다층의 레이어를 지닌다. 우선, 주인공 주인의 세계가 있고 그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의 삶이 있다. 또한, 주인의 커뮤니티에서의 만남들, 그리고 영화의 중심부를 꿰뚫는 역할을 하는 미도언니(고민시)가 있으며, 주인의 연애사까지. 다층의 레이어로 쌓여있는 주인의 세계를 우리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차곡차곡 읽어간다.



극 중 미도언니와 주인이 하천 옆을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남들은 다 쉽게 하는데 (나만) 어려운 것 같은 것이 뭐냐는 대화 속에 미도는 말한다. “용서. 내가(스스로가) 용서가 안돼. 아직도.”, “그래도 노력해야겠지, 아직 살아있으니까.” 주인과 같은 상처가 있는 미도는 법정에서 자신이 과거 가해자에게 하트 이모티콘 등을 보냈다는 것을 이유로 자신의 억울함을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날 피해자에게 더 차가운 사회 시스템 속에 유일하게 미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 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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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전작 <콩나물>,<우리들>,<우리집> 등은 모두 어린이가 등장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보다는 더욱 성장한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령대가 올라가는 것 뿐 아니라 그만큼 윤가은 감독의 연출과 각본의 수준 또한 상승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거 비교적 미시적인 규모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이번 영화에서 윤감독은 주인공 ‘주인’을 통해 비단 주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보다 크고 거시적인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영화 속 주인의 모습은 관객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다. 주인은 열렬하게 연애하고, 사랑하고, 친구들에게 다소 거친 장난도 치며 자신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영락없는 고딩이다. 비록 남자친구 수호와의 스킨십에 멈칫하는 순간이 있고, 가끔은 혼자만의 터널에 갇혀있는 모습도 있지만 그게 주인의 전부는 아니다. 누구보다 활발하고 강하고 당차보이는 주인, 그리고 동시에 슬프고 외로운 주인은 피해자라는 틀로 가두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다. 이처럼, 주인을 어떠한 스테레오타입으로도 꾸며내지 않고 다채로운 한 인간으로 그린 것에는, 주인을 연기한 서수빈 배우의 공이 크다. 서수빈 배우는 꾸러기같은 얼굴로 장편 데뷔작 답지 않은 힘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주인의 얼굴을 입은 서수빈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두 시간이라는 상영 시간 동안 관객들이 단 한 순간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스크린 앞으로 집중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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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성장 서사를 그려낸 다양한 작품들에는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거나 관객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작품들도 다수 존재했다. 어떠한 피해를 그린답시고, 그것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로 다가오게 하는 배려 없는 작품들에 우리는 많은 비난을 해왔다. 반면 이 작품을 통해 윤가은 감독은 다정하고 섬세하면서도 용기있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또한 우리가 가장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조로, 주인이의 서사를 처음부터 다 풀어내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주인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풀어질때 쯤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아 그래서…’라는 생각을 하게되는데, 이또한 스스로를 흠칫 반성하게 만드는 포인트 중 하나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은 장래희망란에 ‘사랑’이라고 적어낸다. 이토록 사랑이 많은 주인공 주인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주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침범할 수 없다. 나아가든 나아가지 못하든 그것은 타인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느끼고 이해한다. 극이 다 끝나고 막이 오를 때 우리 마음에 남은 것은 무얼까. 그저 세계를 활보하며 걸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작고 큰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마음, 그 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