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영화 평론
컴컴한 단칸방, 자신이 사는 고시원은 볕이 너무 조금 들어 슬프다는 여자에게 커튼을 열어 젖히며 햇살을 가득 선물하고는 “이거 다 너 가지라”는 남자. 2025년의 마지막 날 개봉한 김도영 감독의 장편 신작 영화 <만약에 우리>다. 김도영 감독은 2019년 <82년생 김지영>으로 널리 알려져, 그 이후로도 제 2023년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톡톡튀는 단편 <저, 엉덩이만 들여놔도 될까요?>로 새로운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최근 2026년 1월에는 <당신이 영화를 그만두면 안 되는 30가지 이유>에서 1막 파트를 맡으며 관객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김도영 감독이 2025년 마지막 날 야심차게 내놓은 이번 영화 <만약에 우리>의 관전 포인트는 구교환, 문가영이라는 반짝거리는 두 스타의 청춘멜로 그리고 이들이 극 중 마주하는 현실의 벽을 우리 삶과 맞닿아보는 일일 것이다.
현실 앞에서의 우정과 사랑
영화는 구교환이 맡은 ‘은호’와 문가영이 맡은 ‘정원’의 2008년 그리고 현재를 넘나들며 둘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지긋지긋한 현실 앞에서의 그들의 관계를 여실히 그린다. 2008년,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서로를 이상하지만 궁금한 이방인을 향한 눈으로 바라보는 둘은 단숨에 가까워지고 어느새 ‘영혼의 단짝’이 된다. ‘차가운 도시’ 서울로 상경해 남몰래 건축사의 꿈을 꾸며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가는 정원과 그런 정원을 짝사랑하는 은호. 고아원에서 자라 의지할 곳 없는 정원에게 은호는 집이 되어주고, 실제로 집을 내어 주며 동거를 시작한다. 여느 청춘멜로에서 그렇듯 차가운 현실 따위 사랑으로 이겨낼 것 같았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취업, 꿈 등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고시원에서 살면서 햇빛을 보지 못해 슬펐다는 여자에게 커튼을 열어 해를 한가득 선물해주던 남자는, 여자가 커튼을 젖히자 게임에 방해된다며 짜증을 내는 남자가 되고 만다. 결국 현실 앞에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은 초라한 무엇으로 남고 불필요한 의심과 서로를 향한 어긋난 책임감이 그들을 이별로 이끈다.
극 중 구교환과 문가영이 그려내는 청춘의 사랑은 ‘없음에도 행복한’ 사랑이다. 없음을 부족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가 함께 채워나갈 수 있어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둘이 그려내는 미래가 아름답고 또 단단하기에, 지금 당장 비싼 밥을 못 먹어도, 택시 대신 돌고 도는 버스를 타고 귀가해도 둘이라 그저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우정으로도 남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은호는 자신의 게임을 끝까지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게임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현실에 자꾸만 부딪친다. 동시에 정원 또한 건축사의 꿈이 있지만 당장의 생계 때문에 공부 대신 일을 택한다. 서로는 한 집에 살며 ‘서로를 위한다는’ 말로 곧 부서질 설탕같은 ‘청춘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설탕으로 지은 집은 금세 부서지고 마는 것. 그렇게 헤어진 둘은 현재 시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이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우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만약에 우리가
한 눈에 봐도 둘은 과거의 단칸방 시절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삶을 잘 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운명은 우연으로 인해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김도영 감독은 2008년의 은호와 정원을 다채로운 색으로 보여주는 한편, 현재 시점의 은호와 정원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전부 흑백처리를 하는 과감함을 시도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끝나버린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은호가 그려내는 게임 세상의 엔딩을 보며 정원이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에릭이 제인을 못 찾으면 어떻게 돼? 새드엔딩이잖아” 은호가 대답한다. “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려”. 그들의 현재는 새드엔딩일까?
우연히 만난 둘은 비행기 지연 대기를 위해 잠시 같은 호텔 방에 기다리게 되고, 은호는 대화 중 어린 딸에게 걸려온 영상 통화를 받는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정원은 호텔 밖으로 뛰쳐나가고, 그런 정원을 잡기 위해 은호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는데, 결국 이번에도 은호는 정원을 찾아내고, 어떻게 찾아냈냐는 물음에 답한다. “니가 찾을 수 있을 만큼만 도망치잖아, 매번.” 잡을 수 있을 만큼만 도망치는 여자와 그럼에도 매번 뛰어다니며 찾아내는 남자의 사랑은 현실 앞 이렇게 끝이 난다. 과거, 헤어지던 마지막 날 은호는 처음으로 출발하는 지하철 앞에서 정원을 놓쳤다. 그 때를 회상하며 “만약에 내가 그때 지하철에 탔었다면” 우리 여전히 함께였을 거냐며 내가 너를 놓친거라는 은호에게, 정원은 그래도 언젠가 헤어졌을 거라면서 “서로가 서로를 놓은 것”이라고 답한다.
우리는 자주 ‘만약에’를 들먹이며 그때 그랬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스스로 묻는다. 이 물음에 영화는 그때의 선택이 옳았음을, 무슨 이유로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그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다독인다. 은호와 정원은 서로가 서로를 놓았기에 각자가 원하는 현재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들이 서로를 놓았다고 해서 그들의 아름다운 그 시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은호와 정원이 각자 서로가 없는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마지막은 그들이 한 시절을 뒤로 하고 잘 건너왔음을 드러낸다. 그렇기에<만약에 우리>는 우리가 치열하고 가난하면서도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스스로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오늘을 다시 살아가야만 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