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허겐 여행 1,2일차의 생각
여행을 오기까지 쉽지 않았다. 출발 2주 전까지도 비행기표를 취소할지 고민했다. “왜 하필 코펜하겐이야? 거기 할 거 없지 않아?”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사실 나도 이곳에 가는 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결국 이렇게 와버렸다.
코펜하겐은 출장 일정이 있는 P가 함께 가자 해서 비행기표를 예매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표만 남았다. 대학생 때 잠깐 스쳐간 도시이기도 해서, 이렇게 된 김에 다시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첫날엔 계획했던 이틀 치 일정을 모두 끝냈다. 로젠보르크 성, 인어공주상과 게피온 분수, 크리스티안하운 지역 구경과 종탑 오르기, 뉘하운 운하 산책까지.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있었지만, 알아보고 정리하는 건 귀찮았다. 그래서 여행 계획을 ChatGPT에게 맡겼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내가 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물론 시차 적응을 못 해 새벽 다섯 시 반에 깨어버린 탓도 있었겠지만.
첫인상은 이랬다. 예쁘고, 비싸고,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 그리고 꽤 조용했다.
예쁨에 대해 말하자면, 거리마다 작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고, 조금만 걸어도 운하가 나타났다. 운하에 떠 있는 작은 배들을 보고 있으면 “평화롭다”는 말이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예뻤다. 덴마크 남자들이 그렇게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보니 정말 잘생겼다. 다만, 나와는 전혀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다르듯, 완전히 다른 생물 같았다. 어디선가 남자 평균 키가 182cm라고 읽었는데, 아마 이민자들이 평균을 많이 낮추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Church of Our Saviour에서 표를 살 때 직원이 나를 보고 학생이냐고 물었다. 나이를 가늠도 못 하는 눈치였다. 학생이 아니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코펜하겐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만 대답했다.
비싸다는 건, 정말 비쌌다. 나름 서울에서도 물가 비싼 동네에 살고 있지만, 여기서는 체감이 또 달랐다. 평범한 마트에서 산 500ml 생수가 4천 원 정도였고, 숙소 근처 카페에서 빵 하나와 커피를 시켰더니 2만 3천 원이 나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도 빵 두 조각에 버터와 잼, 반숙란이 딸린 세트에 커피까지 합쳐 3만 9천 원이 나왔다. 1DKK가 215원이지만, 체감으로는 1DKK가 100원쯤 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쯤 여행하는 건 괜찮지만, 직업 없이 여기 살라고 하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전거. 이곳은 정말 자전거 천국이다. 따릉이 같은 공유 자전거 앱 Donkey Republic으로 첫날에만 세 시간 넘게 탔다. 대중교통보다 훨씬 빠르고, 자전거 전용도로도 잘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주 교통수단으로 삼게 된다. 서울처럼 차나 보행자가 자전거 도로를 막는 일도 없고, 도로가 중간에 끊기는 일도 없다. 수많은 자전거 행렬에 섞여 다니다 보면 덜 걸어도 되고 마음도 편해진다. 다만 오늘은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잠시 쉬기로 했다.
조용하다는 건, 곧 심심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티켓을 사거나 커피를 주문할 때를 빼면 하루 종일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스몰토크를 거는 사람도 있었는데, 예컨대 궁전 경비원이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 “남한”이라고 하자, “지난달에 서울을 다녀왔는데, 어쩐지 거기 사람들이랑 똑같이 생겼더라.”고 하더라. 보통 대도시에 오면 사람 구경에 정신이 없는데, 여기서는 하루 만에 고요가 심심함으로 바뀌었다.
심심하니 결국 생각이 내 쪽으로 돌아갔다. 최근에는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바쁘게 지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약속 없는 날이 거의 없었고, 무엇이든 일정으로 채워 넣었다. 얼마 전엔 유행하는 ‘ChatGPT roast’를 나도 해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취미들—독서, 와인, 운동 같은 것들—이 사실은 외로움을 덮으려는 수단일 뿐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맞냐고 물었다. 솔직히, 맞는 말 같았다. 외롭지 않으려면 내가 단단해져야 하는데, 그 대신 자꾸 외적인 것에만 기대왔다.
그러다 생각이 더 깊어졌다. 지금 내가 남자친구가 없는 건 단순히 인연을 못 만난 탓이 아니라, 혹시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닐까. 나는 완벽하지 않으면서 상대는 ‘적어도’ 성격만큼은 완벽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자주 가진다. 백마탄 왕자님이 없단걸 이제 알아야하는데도.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프고, 눈물이 뚝 떨어진다.
이런 걱정을 하다 보니 예전에 끝났던 관계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몇 년 전 헤어진 그도 그랬다. 그 직후에 워낙 큰 일이 있어서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왜 지금 시점에 그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W와의 이별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아마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 생겨서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쪽 주된 이유는 회사였다. 당시 나는 부사수에게 지쳐 있었다. 반대로 그는 매일 사수를 욕했는데, 나는 오히려 부사수 때문에 괴로워서 그의 사수 입장에 더 공감하게 됐다. 그 순간부터, 좋아하는 마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 글은 여행 이틀째 아침, 빵과 커피를 먹으며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밤 8시 40분이 됐다. 원래라면 대도시에 왔으니 혼자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거나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를 찾았을 텐데, 오늘은 졸려서 저녁도 거르고 숙소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자면 새벽에 또 깰 테니, 글을 쓰며 조금만 더 버텨보려 한다. 내일은 부디 아침 7시에 깨면 좋겠다.
오늘은 무엇을 했더라. 새벽엔 숙소 앞 Stadsgraven 호수를 산책했고, 아침으로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마셨다. 뉘하운 운하에 가서 Canal Tour를 탔는데, 햇볕이 너무 강해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까매졌다고 놀림받을 것 같다. 그래도 보트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오늘은 자전거를 쉬는 날이라 많이 걸어 다녔는데, 덕분에 예쁜 작은 가게들을 많이 발견했다. 쇼핑 거리를 걷다가 혹시 유럽이라 더 저렴할까 싶어 프라다 가방을 구경했는데, 가격이 한국과 거의 똑같았다. 텍스 리펀을 받아도 세관에 신고하면 결국 그 값일 것 같아 사지 않았다. 와인도 구경했지만 크게 싸지 않았고, 로얄 코펜하겐 도자기를 살까 고민하다가 짐이 될 것 같아 포기했다. 점심으로 삼겹살 튀김에 와인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정보 없이 덴마크 디자인센터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미끄럼틀이 있어 한 번 탔다. 오늘 하루 중 가장 도파민이 솟았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그냥 여행 정보만 나열한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이 심심했던 하루가 그리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