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3, 4일차 이야기
3일차, 햄릿의 성과 루이지애나의 바다
3일차엔 동행을 구했다. 아직 앳된 얼굴의 학생이었는데, 학회 참석차 덴마크에 왔다가 여행 중이라고 했다. 모른 척 그의 학회 이야기를 듣고, 함께 햄릿의 배경인 크론보르 성과 아름답기로 소문난 루이지애나 미술관으로 향했다.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어릴 적 읽은 햄릿의 내용이 가물가물해 기차 안에서 줄거리를 찾아봤는데, 오히려 이런 흐린 날씨와 참 잘 어울렸다. 성 안에서는 민속촌처럼 배우들이 미니 공연을 하고 있었고, 특히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했다. 다만, 셰익스피어가 실제로 덴마크에 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에 도착해서는 점심을 먹었다. 치즈 샐러드와 맥주를 시켰는데, 미술관 내 카페니 맛은 그냥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둘 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내부 전시도 훌륭했지만, 잔디 언덕 위 야외 조각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언덕 위 잔디밭에서 말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며 꺄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코펜하겐에 돌아와서는 동행과 맥주집 두 곳을 돌며 바비큐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활기찬 분위기, 맛있는 음식, 그리고 맥주까지,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화장실 문에는 ‘불쾌한 접근을 받거나 위험하다고 느끼면 스태프에게 바로 말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헌팅을 싫다 해도 계속 시도하는 사람이 있긴 한가 보다. 만국 공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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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덴마크의 아침과 티볼리의 밤
전날 술을 조금 늦게까지 마신 탓인지, 평소 새벽같이 일어나던 내가 이날은 7시에야 눈을 떴다. 시차 적응이 된 느낌이었다. 카페에서 커피와 모닝플레이트로 하루를 시작하고,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은 도서관에 가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간 도서관에는 1900년대 초반 책들이 가득했고, 열심히 공부하는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나도 잠시 앉아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겼다.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 근위병 교대식을 보았다. 햇살이 뜨거웠는데, 복장을 완벽히 갖춘 근위병들이 얼마나 더울까 싶었다. 그 후엔 젤라또도 먹고, 핫도그도 먹고, 만화책 가게와 조명 가게 같은 동네 상점들을 기웃거리다 세계 최초의 놀이공원이라는 티볼리에 갔다.
입장권만 끊고 들어갔을 땐 생각보다 예쁘지 않아 돈이 아깝나 싶었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잔디밭에 앉아 공연을 즐기고,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도 추고 있었다. 모르는 가수였지만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맥주 한 잔을 들고 잔디밭에 앉아 공연을 즐기는데,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아, 하나 더 기억에 남는 순간. 티볼리 안 가게에서 맥주를 살 때 메뉴판엔 65크로네라고 되어 있었는데, 계산할 땐 70크로네였다. 세금인가 했더니 컵 보증금이었다. 컵을 반납하니 5크로네 동전을 돌려줬다. 여행 내내 처음 본 덴마크 동전이었다. 왠지 귀엽고 의미 있게 느껴졌다.
기차역에서 루이지애나 미술관으로 향하던 길엔 주택가가 늘어서 있었는데, 몇몇 집은 마당에 벼룩시장처럼 물건을 진열해놓고 ‘물건은 가져가시고 돈은 우편함에 넣어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현금이 없어 아무것도 사지 못했지만, 그때 이 5크로네 동전이 있었다면 작은 기념품이라도 하나 샀을 텐데. 괜히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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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마음이 정돈되는 여행
오늘은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새벽에 한 번 깼지만 다시 잠들었고, 푹 자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이제 시차도 완전히 적응된 듯하다. 1, 2일 차엔 좀 우울했는데, 3, 4일차엔 그런 기운이 전혀 없었다. 시차 적응 과정에서 오는 감정기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는 시간이 흐트러지면 감정에도 영향을 주는 걸까.
지금은 카페에 앉아 여행기를 쓰고 있다. 3~4일차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보냈고, 그만큼 여유도 생겼다. 예전에 ‘현실이 불만족스러워서 도피성으로 여행을 간다’는 글을 읽고, 우울할 땐 그 말이 괜히 찔렸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이 든다. 현실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면, 도피가 아니라 리프레시다. 이 시간이 있었기에 돌아가서도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면 회식, 와인 모임, 소개팅, 부모님 댁 방문 등 일정이 이미 가득하다. 그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