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생긴 일

코펜하겐 6일차 저녁 이야기

by Rr

5, 6일차 여행기를 써야 하는데, 기억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6일차 여행이 끝난 뒤, 공항에서 벌어진 일부터 쓰기로 했다.


5일차인 금요일엔 말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사전 정보 없이 즉흥적으로 했던 일들이 신선했고, 예상치 못한 장소들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졌다. 원래는 저녁에 코펜하겐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재밌게 놀다보니 결국 자정 무렵 기차를 타게 됐다. 국경을 넘는 열차가 자정 이후까지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토요일 아침, 마지막 날을 기념하며 전날의 여운을-여운인지 도파민인지를, 글로 남기고 싶어 카페에 갔는데, 외부 좌석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된 자리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늘을 찾는 한국인이니까) 결국 공원의 그늘로 자리를 옮겨 빵과 커피를 즐기며 사람 구경을 하다 글쓰기는 또 미뤄졌다.


토요일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였다. 자전거에서 넘어져 손바닥이 까지고 몸에 멍이 들었지만, 심지어 그런 일조차 여행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코펜하겐에서 저녁에 출발하여 암스테르담을 경유하여 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직항 노선이 없어 경유를 해야 했고, 첫 비행기가 지연된 탓에 환승 시간은 고작 30분. 다행히 항공사 직원이 첫번째 비행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암스테르담 공항을 전력질주했다. 항공사 직원이 미리 말해두었는지, 코리안에어?라는 질문만 듣고 패스포트 컨트롤을 1초 만에 통과했고, 숨을 헐떡이며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비행기에서 가장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예전에 많이 좋아했던 전남친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바로 직전의 연인은 아니지만, 굳이 전前을 여러 번 붙일 것도 없으니 그냥 전남친이라 부르겠다. 원래는 P 옆자리를 예약했다가, 변경 과정에서 마땅한 좌석이 없어 고른 자리, 바로 그 옆이 그의 자리였다. 영화나 소설에서만 접한 일이 내게도 일어날 줄 이야.


서울 어딘가에서 마주쳤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질주 끝에 탑승한 비행기 안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땐 말 그대로 “어머!” 하는 감탄이 나왔다. 심지어 좌석 번호를 확인하니, 그의 옆 빈자리가 내 자리였다. 그는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 대하듯 말없이 내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줬다.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그에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나 보다. 한 번 더, 조용히 자기반성을 해본다. 그가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지내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나란 존재가 안 좋은 기억이었는지.


우리는 그렇게, 말 한 마디 없이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함께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 대신 긴 시간이 있었고, 어쩌면 이제는 아무 의미도 남지 않은 기억들만이 존재했다. ‘이 사람은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났구나’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려졌다. 외롭고 서운했지만, 묘하게 평온했다. 이 장면조차도 내 이야기 속 한 장면으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지,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뭐 어쩌겠어.


인천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는 꽤 시간이 걸려서, 전남친도, P도 멀리서 눈에 띄었다. 나라도 먼저 인사를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사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뛰던 그 때에-항공사 직원이 두번째 비행기를 같이 타는 사람을 한데 모아 같이 뛰게 했다.- P랑은 인사를 하긴 했다. 하지만 전남친과도 인사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미련에서 나온 건 아닐까. 결국은, 그도 그랬듯 나도 아무 말 없이 지나치는 게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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