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두아> 재밌었당.
드라마 <레이디두아>를 보았다. 가짜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 세상을 속이는 기만극을 보며,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명품은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로고 하나에 수천만 원이 오가는 현상을 조롱하고, 그 껍데기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을 파멸로 응징한다. 하지만 화면을 끄고 난 뒤, 내 마음속엔 반문이 남았다. “정말 그 아름다움이 다 가짜일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탐미주의는 스무 살, 그 반짝거리던 미우미우의 핑크색 핸드백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내가 보기엔 '명품'이라 부르기엔 다소 수줍은 체급이지만, 당시의 내게 그 핑크빛은 여대생이 갖춰야 할 완벽한 문장이었다. 그 가방을 메고 캠퍼스를 누비며, 나는 내가 꿈꾸던 아름다움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기분을 만끽했다.
두 번째 기억은 이십대 초반에 엄마 찬스로 손에 넣었던 구찌의 쇼퍼백이다. 유행의 정점에 있던 그 가방이 어찌나 고급지고 예뻐 보였던지, 마치 교복처럼 매일같이 메고 다녔다. 결국 가죽이 살짝 헤질 정도로 손때가 묻었지만, 그 헤짐조차 내가 그 가방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증명하는 훈장 같았다. 사촌 동생에게 물려주었는지 행방은 묘연하지만, 지금 다시 든다 해도 여전히 예쁠 것이라 확신한다. 그때의 내 설렘은 결코 허상이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심장이 뛴다. 최근 내 마음을 흔든 건 까르띠에의 ‘탱크 루이’다. 나는 평소에 시계를 잘 차지 않는다. 실용성으로 따지자면 내 손목 위에서 그 기계장치는 무용지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직선의 미학, 고전적인 로마자 인덱스의 우아함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은 '시간 확인'이라는 기능적 이유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이쁘니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물건은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술을 마실 때 소주보다 위스키나 와인을 찾는 이유도 같다. 단순히 취하기 위해서라면 소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위스키의 짙은 수색을 감상하고, 입안에 머금었을 때 퍼지는 풍부한 맛과 향을 음미하는 과정은 ‘생존’이 아닌 ‘향유’의 영역이다. 이쁘고 맛있는 것,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 어째서 지탄받아야 할 허영이란 말인가.
연애도 마찬가지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을 두고 ‘외모라는 허상에 속고 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정직한 기제다. 나도 멋진 남자에게 끌리는 만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피부를 가꾸고, 몸매를 관리하며, 좋은 옷을 골라 입는 행위 또한 타인에게 비치는 나의 실루엣이 근사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나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자존감의 표현이다.
나는 내가 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가치 있는 미학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 이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가 아니라, 내 세계를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채우려는 취향의 발현일 뿐이다. 명품이 허상이 되는 순간은 오직 하나, 그 로고가 ‘나’라는 존재보다 앞서 나를 증명하려 들 때뿐이다.(이 글 전체가 tmi지만 tooooo much하게 내 취향을 얘기하자면, 로고플레이는 예뻐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내가 그 물건의 미학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면, 그 물건은 허영이 아니다.
셰리 위스키의 첫맛은 달콤하지만 끝맛은 묵직한 오크 향과 알싸한 스파이스로 마무리되듯, 나의 소비 또한 단순한 쾌락을 넘어 나만의 견고한 취향으로 남길 바란다. 가짜 브랜드의 사기극은 허상일지 모르나, 예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손때 묻도록 사랑했던 나의 마음은 가짜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