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R아. 우리 여기까지 하자.
대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S와의 연애가 끝났다.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내 짝은 없나 하며 고민하며 소개팅을 반복하던 어느 날, 나는 S를 만났다.
두 살 연상의 대전에서 근무 중인 연구원. 그리고 한 장의 호감형의 사진.
내가 소개팅 전에 받았던 정보였다.
대전이라는 거주지 때문에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들어오는 소개는 마다하지 않고 다 받자는 마음가짐을 가진 때였으니까.
그를 만나기로 한 첫날, 여의도에서 일차 소개팅을 빠르게 마친 뒤 고터로 향해 이차 소개팅 상대인 S를 만나러 가던 길,
저 도착했어요. 책 읽고 있을 테니 R씨 오시면 연락 주세요.
S에게서 카톡이 왔다. 책 읽는 남자라니 호감도 상승.
그는 그날 <삼체>를 읽고 있었다. 얼굴은 사진과는 살짝 달랐지만 뭐, 사진 보정 안 하는 사람이 있나. 오히려 사진과 달리 조금 테디베어스러운 외모가 맘에 들었다. 난 테디베어를 좋아하니까.
삼체 어때요? 전 넷플로 도전했는데 조금 지루해서 초반에 하차했거든요.
하하 저는 이쪽 분야를 공부해서 그런지 재밌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문과 쪽에서는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는 나랑 똑같이 추리소설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가 입고 온 하얀 셔츠에 달려있던 귀여운 노란 해바라기 와펜으로 유추해 보건대, 나랑 똑같이 평범함 속에 귀여움 한 스푼을 얻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향긋한 술을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했다. 그는 와인, 나는 위스키를 좋아한다게 달랐지만. 잠깐잠깐 보이는 오타쿠적 모먼트도 좋았다. 나도 그러니까. 닮은 게 많은 사람, 그를 처음 만난 날의 소감이었다.
혹시 R씨 다음 주 시간 어떠세요? 토요일이나 일요일?
그렇게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그를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나던 날, 삼프터 때 사귀는 게 국룰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결혼을 전제하며.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대부분 즐거웠다.
같이 카페에서 책을 읽고, 여행도 한 번씩 가서 좋은 걸 보고, 그가 소개해주는 와인들을 마시고, 보드게임판에 양탄자를 깔고, 카드를 섞으며, 즐거웠다. 내가 순수롤을 먹고 싶다 하면 동선이 맞지도 않으면서 성심당에서 롤을 사다 주는 모습이나, 일본 출장을 가서 사 온 카스텔라, 호주 출장을 다녀와서 사다 준 어그와 코알라인형에 사랑받고 있구나 생각을 했다. 점점 서로의 말투를 닮아가며, 이 말투의 원조가 S인지 아니면 나인지도 모르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 좋았다.
그 생각에 금이 간 건 어느 추웠던 날. 그는 서울의 한 대학교에 출장을 왔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자 하여 평일 밤 만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잠깐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 서울역에서 10시에 출발하는 기차였던가, 역까지 그를 배웅해 주고 집에 들어가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기차 잘 탔어?
사라지지 않는 1.
잘 탔을 거고 늦은 시간이니까 기차에서 졸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깜빡 잠이 들었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여전히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열 시 기차면 대전에 열한 시 좀 넘어서 도착이고, 집 들어가서 씻어도 열두 시인데. 혹시 자다가 내릴 곳을 놓치고 계속 자고 있는 거 아냐? 전화해봐야 하나? 아니, 근데 그냥 집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걸 깨우면 어떡해.
이런 고민을 오래간 하다가 결국 전화하기를 포기했는데,
다음날 평소와 같은 아침인사 카톡에 ’ 오빠 나 서운해 ‘라 하니 뭐라 답장이 왔더라. 정확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카톡을 보긴 했지만 피곤해서 기차 내리자마자 택시 타고 집 와서 잤어. 그런데 내가 피곤한걸 왜 이해 못 하고 서운해해?‘류의 답이었던 것 같다.
피곤하면 답장을 깜빡할 수도 있지. 그런데 다른 날도 아니고 밤에 기차 탄 날, 남자친구가 무사히 귀가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못 할 일인가? ‘피곤해서 기차 내리자마자 택시 타고 집 와서 잤어, 걱정했다면 미안해, 다음번엔 안 그럴게.‘ 정도로 답장이 왔다면 서운함이 풀렸을 텐데.
그는 술약속이 많고 야근도 많아,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집에 잘 들어왔다 해주는게 뭐가 어렵냐며, 평소에도 밤에 집에 들어가면 들어갔다고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에, 내가 유치원생도 아닌데 그건 너무 과해,라는 답을 듣고 유치원생 발언은 심한거 아니냐며 밤에 전화통화하며 울다가, 결국 매번 그럴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단 답을 듣고 끝났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만났다.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챗gpt로 갤러그 게임을 만들며.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기념일 날, 다음날이 휴일이기도 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루 휴가를 내고 대전에 갈 계획을 세웠다. 퇴근 후, 서울에 일정이 있어 온 S의 차를 타고 같이 대전에 갔다. 기분이 유독 좋았던 날이었다. 차를 타고 가며 테드창의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S가 테드창의 소설 중에 엔트로피의 개념이 나오는 작품을 언급했는데, ‘그런데 엔트로피가 뭐야?’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자, R아 봐봐, 여기 돌멩이가 있어.’라고 운을 떼며 설명을 해주고, 그렇게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늦은 시간 그의 집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나 같이 그의 직장으로 향해 그는 일을 하러 가고, 나는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에세이도 한 편 쓰고, <시그널>이라는 옛날 드라마를 보며.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았다.
그는 나를 위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고, 우린 같이 쇼핑을 하고, 한 번쯤 가고 싶었던 태평소국밥을 갔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함께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위스키바에 가고 싶었지. 위스키를 마시며 그에게 내가 그날 썼던 글을 보여주었고, 그도 예전에 일기를 썼다며 한 편 보여줬는데. 너무 내 뇌에 선명하게 박힌 글자들. ㅇㅇ이가 보고 싶다, ㅇㅇ이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지는구나. 여기서 ㅇㅇ이는 누가 봐도 여자 애칭.
맘엔 안 들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맘엔 안 들고, 진지하기엔 또 몇 년 된 일기고. 장난식으로 ‘너 죽을래?!’ 하는 내 말에 ‘힁, 잘못했슙니다.’하던 그,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오버했던 것 같다. 몇 번 더 죽을래? 잘못했지? 하며 그에게 내 딴엔 장난을 쳤는데 기분이 나빴나 보다. S는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며 자리를 일어섰고 집에 가는 길에 말수가 적어졌지.
‘과하게 장난쳐서 미안해.’라는 말이 나왔어야 하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화가 날 사람은 난데 왜 네가 화를 내?’였지. 예전 그의 ‘피곤해서 기차 내리자마자 택시 타고 집 와서 잤어. 그런데 내가 피곤한걸 왜 이해 못 해?‘라던 말처럼. 우리 나쁜 점도 닮았구나. 그리고 또 나는 울면서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게 잘 안 느껴진다 했고, 그는 그냥 자자 하고. 그날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등을 돌리고 잤다.
알고 있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하는게 잘 안 느껴진다는 말은 S가 듣기 싫어할 말이란걸. 알면서도 못된 나는 그 말을 해버렸고. 안 좋아하진 않았을거란걸 알면서도 속상함을 표현할 방법을 못 찾았던 거 같다. 지난번 그 유치원생 발언 때 받았던 상처가 며칠 안 되었기에, 그 뒤로 서로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어 치유된 적이 없기에.
아,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S만 자고, 나는 안 잤다. 속이 상해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건지, 낮에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며 마신 커피가 과했던 건지. 등 돌리고 자는 그도 밉고, 머릿속에서 그가 썼던 ‘ㅇㅇ이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는 텍스트도 머리에서 돌아다니고. 그는 나를 향해서는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을까?
아침에 일어난 그는 화해의 제스처였던지, 나를 끌어안으며 더 잘까? 아님 밥 먹을까? 아님 시그널 볼래? 하며 살갑게 굴었지만 밤을 꼴딱 새우며 머릿속으로 온갖 안 좋은 상상의 나래를 펼친 나는 혼자 휴대폰을 보겠다며 틱틱댔고.
그렇게 우리는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갔지만 대화는 없었다. 손은 잡고 있으면 따뜻하니까,라며 장갑을 손을 잡지 않는 한 손씩만 끼던 행동도 하지 않고. 그리고 집에 돌아온 그는 내게 ‘대전역에 데려다줘?’라고 했지. S가 서울로 올 때면 내가 서울역이든 고터든 마중 나가고 배웅 나가고, 내가 대전에 갈 때면 S가 대전역에 마중 나오고 데려다주는 것이 우리끼리의 룰이었는데, 데려다 주기 싫단 말이구나. 그 말을 듣자 빠르게 집에 가서 혼자 있고 싶어졌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했던 그와의 카톡.
미안해. R아. 우리 여기까지 하자.
대면으로도 아니고, 하다못해 유선도 아니고, 카톡 메시지로 연애가 끝났다. 허무하구나. 이게 마지막 대화이기에, 내가 이해심이 많았더라면 우린 잘 만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카톡으로 해봐야 마음이 전달될까. 그래서 보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이 있던가? 전화로도 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만나서는 오늘 마신 살랑거리는 피노누아 이야기를 하고, 다음번엔 어떤 보드게임을 할까, 뮤지컬 알라딘이 재미있대,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다 쏟았지 않았나. 우리가 사랑을 했던 게 맞을까? 좋아한다 했지만 정작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상처주는 행동들을 하지 않았던가.
S와의 연애를 곱씹다가 문득, 쿨하게 그의 집에 두고 온 나의 짐들은 버려달라 했던 말이 후회가 되었다. 그와 함께 운동하려 갖다 놓았던 운동복, 귀여워서 내가 좋아하는 건데. 놓고 온 속옷도 그중 두 세트는 거의 새 거인데. 두고 온 빗, 아베다껀데. 그리고 내 집에 있는 그의 짐들도 보며 버리기 아깝단 생각을 했고. 그와 찍은 사진이나 칫솔, 면도기 같은 건 바로 쓰레기통에 넣긴 했지만 그래도 이 맨투맨 S가 좋아하던 건데, 이 이솝 크림은 S가 지난달에 사둔 건데. 그도 짐을 버려달라 했던 말을 후회할까, 아니면 미련없이 새 맨투맨과 새 화장품을 샀으려나.
그와 헤어지고 다음날이었던가, 주선자에게 보고를 하려,
저 S와 헤어졌어요.라고 카톡을 하니, 몇 시간 뒤 온 답장.
R은 의사는 별로라고 했던가? 아직도 소개 안 받을 거야?
그리고 온 두 장의 사진.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 했던가,
다음번엔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고, 양껏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