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읽었으니 포장이라도 잘하자!
2025년은 책을 많이 읽은 해는 아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한 해에 30~40권쯤 읽는데, 2025년은 17권 읽었네요.
그중 절반이 넘는 9권이 일본 추리, 미스터리였고요.
심지어 그것들도 중간에 책이 재미없어져서, 어떻게든 책 좀 읽어보겠다고 몸 비틀며 집은 책들이었습니다.
“이전 BOTY들을 생각해 보면 항목이 11개나 되는데, 17권 읽고 그걸 다 쓸 수 있나요?”
몰라 레후.
어차피 이 글의 대다수 항목은 원래부터 어거지였습니다.
그리고 어워드는 양이 아니라 기세입니다.
사실 숫자만 놓고 보면 조금 아쉬운 해이긴 합니다.
하지만 해마다 독서가 꼭 권수로만 남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억지로 의미를 붙여보자면, 2025년 독서는 나름 서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꿈보다 해몽일 수 있습니다. 어쩌라고
아무튼 2025 BOTY 시작합니다.
가끔 책 관련 커뮤질을 하다 보면 “인생에서 베스트 N권만 꼽아봐”라는 떡밥이 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뭘 넣어야 간지 나면서 적당히 본인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당당히 넣을 책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5점 만점에 10점짜리 책.
독서는 간접경험이고, 그를 통해 삶을 배운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바로 이 책입니다.
31살의 송도원과 서른 즈음의 필립의 삶에는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작가가 자신의 일대기를 통해 드러내는 삶 자체에 대한 예찬은 감동이 넘쳤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한 필립의 모습에선 진짜 박수를 칠 뻔했읍니다.
송도원 인생 역대급 책. 한 권을 덮고 이 정도의 여운을 느낀 게 얼마만인가 싶네요.
사실 연초에 읽은 책인데, 이 책이 너무 세서 2025년 독서 난이도가 전체적으로 올라갔습니다.
연초부터 엔간한 걸로는 만족 못 하는 몸이 되어버렸음.
교양 좀 챙기고 싶어서 체호프를 올해 처음 읽었습니다.
이런 민음사류 문학은 늘 묵직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생각보다 소소한 이야기가 많더군요.
이 이야기는 머물던 마을을 떠나는 남성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마을 처녀와 걷는 장면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는
“아, 이 여자가 고백 갈기겠구나”라는 모먼트,
그리고 주인공이 그걸 거절했을 때의 감정 묘사가 되게 좋았습니다.
쿨하게 거절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그 기회를 놓친 건가 싶어지는 그 미묘하게 찌질하고 애매한 감성.
사랑은 역시 타이밍입니다.
이 정도면 꽤 고전인데도, 사람 사는 건 언제나 비슷한가 봅니다.
사실 내용 디테일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아가씨와 숲길을 같이 걷던 장면의 미묘한 공기가 계속 머리에 남네요.
저는 언제나 단편을 읽을 때 긴 서사보다는 그 잠깐의 인상을 더 중요하게 꼽는 것 같습니다.
박사 졸업 시즌이어서 그런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지
이야기만 많이 듣고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던 이 책을 드디어 집었습니다.
사실 뭐 대단한 해답을 주는 책은 아닙니다.
불안의 원인은 무엇이냐, 그리고 불안의 해결 방식은 무엇이냐를 말해주는 책인데,
원인 부분은 공감이 됐지만 해답 부분은 저한테 아주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비문학의 가치가 뭡니까.
가끔 멈춰 서서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면서 또 불안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삶은 언제나 불확실의 연속이고,
또 언젠가 불안한 상태가 된다면 잠깐 멈춰 서서 이 시기를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나는 내가 이 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찾아낸 내 역할이기에 할 수 있는 만큼 하려는 것뿐이지요. 만약 그래도 안 되면, 그래서 세상 마지막 날이 오면, 그때는 그대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뿐이에요"
이런 직접적인 고백이 배명훈 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1점,
화자가 여성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2점 드립니다.
억지 걸크러시 없이, 약하고 확신도 없는데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하려는 인물.
그리고 인간이기에 사랑에 의지하는 것, 멋지지 않습니까.
부드럽고 불안하고 흔들리니까 사람은 함께인 거고, 그래서 멋있는 겁니다.
필립은 송도원의 워너비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올해는 평소보다 꽤 기억에 남는 남성 인물이 많았는데, 필립이 너무 셉니다.
2023년에는 동물을 뽑았던 올해의 남성 인물 부문에 이런 입지전적인 인물이 나오다니.
여러모로 감동적이네요.
<인간의 굴레에서>의 밀드레드와 <기병과 마법사>의 윤해, 둘이 후보였는데
전자는 인상이 굉장히 강하지만 너무 쌍년이고,
후자는 간만에 본 영웅적인 여성 캐릭터라 그나마 집어보긴 했는데 사실 인상이 조금 약했습니다.
그리고 3년 내내 배명훈 작품 여주를 넣으면 좀 그렇잖아요 ㅎ.ㅎ
그래서 없습니다.
뭔가 2025년은 중반부터 책이 재미없어져서, 재밌는 책을 걸신들린 듯 찾았고
마침 지인이 도파민 독서 고수여서 추천받은 작가가 미쓰다 신조였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일본 추리, 미스터리, 호러를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 이런 류의 책 리뷰를 쓸 때도
“제가 이런 류 소설을 자주 읽진 않지만...”
이런 식으로 밑밥을 깔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저는 이런 장르를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자주 읽는 사람이더라고요.
이렇게 취향에 맞는 작가를 찾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또 읽을 책이 많아지니까요.
특히 미쓰다 신조를 시작으로 일본 추미스를 굉장히 많이 읽게 됐는데,
20대 초반에 독서를 되게 가볍게 하던 송도원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서 꽤 만족스럽네요.
올해도 BOTY입니다. 사실 2024 BOTY는 좀 어거지였던 것 같은데
2025는 진짜 오프더레코드로 얘기할 거리가 많은 책들이 많네요.
언제나 말하지만 스테이크나 파스타같이 품위 있고 잘 차려진 책도 좋지만,
어쨌든 저에게 독서는 오락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제가 좀 더 가치를 두는 일상 독서는 돈까스, 제육, 국밥, 이하 돈제국류의 재밌는 책입니다.
그런 돈제국류의 믿을맨 작가 중 한 명이 정유정입니다.
그런데 간만에 나온 신작이 순수 노잼이라 끝까지 책을 못 읽었네요.
문장력은 오히려 더 좋아지신 것 같은데, 그래서 결국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라는 생각이 자꾸 듭디다.
돈제국류의 책은 결국 뒤가 궁금해서 읽는 건데, 일단 뒤가 안 궁금했고
꾸역꾸역 읽어서 거의 최후반부까지 왔음에도 책이 도저히 안 넘어가서 접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가지가 조금 많지 않았나 싶네요.
기묘한 책입니다.
작품 자체는 <미궁초자>라는 소설 모음집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미쓰다 신조. 예, 작가 본인이죠.
아, 작가를 화자로 넣어서 몰입감을 높인 그런 구조가 기묘했냐고요? 아뇨.
열심히 이 책 1권을 다 읽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44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2권을 찾으려고 보니, 세상 어느 곳에도 2권이 없어요.
문득 “2권이 없는 것조차 설계인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지금 읽은 게 <작자 미상>이 아니고 <미궁초자>인 건가?
미쓰다 신조는 <미궁초자>의 수수께끼를 못 풀어서 실종된 그런 콘셉트인 건가?
나중에 찾아보니 2권은 절판이더라고요. (중고가 한 권에 50000원임 이ㅣㅣㅣㅣㅣ)
일단 책 자체가 재밌기도 했고, 저 경험이 너무 기묘해서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미궁초자의 미스터리는 2026년에도 계속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간에 책이 재미없어져서 걸신들린 듯 재밌는 책을 찾다가 연말에 발견한 책입니다.
책 재미없어서 고른 책의 메인 소재가 "책"이란 게 참 재밌네요. 세상은 트루먼 쇼가 맞다니까.
잘 쓴 판타지는 친절한 설명 없이 세계관을 그냥 독자에게 꼬라박아도 몰입이 됩니다.
그런 뻔뻔함과는 별개로 세계관 디자인은 진짜 철저하게 했음이 느껴졌고,
잘 설계한 세계관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문장력이 합쳐져 읽는 동안 푹 몰입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 두께의 책을 완독 한 게 꽤 오랜만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게 빠르게 읽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책 사랑단이어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피식 웃을 개그들도 좋았고,
책에 달린 주석에 대해서 이딴 건 아무도 재밌게 안 읽는다는 식으로 평가한 부분은 개 쪼개면서 봄
오래간만에 독서에서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 한 권 덕분에 독서가 다시 재밌어졌어요.
덕분에 2026년은 책을 참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아마 언젠가 쓸 2026 BOTY가 풍족하다면, 그건 이 책 덕이 클 겁니다.
사실 다른 해였으면 충분히 1위도 하고 올해의 장편도 할 책인데, 1위가 너무 세다.
글 서두에서부터 밑밥을 깔았지만, 2025년은 책을 많이 안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올해 독서를 돌아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은 결국 이 책입니다.
그리고 올 한 해의 독서 서사를 만든 것도 이 책이네요.
연초에 집은 전투력 높은 책의 여운이 한 해 독서 난이도를 통째로 끌어올려 버렸고,
올라간 기준에 수많은 책들을 중간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런 방황의 과정에서 잊었던 취향을 다시 발견했고,
연말에는 다시 책 읽는 재미를 되찾았습니다.
그래, 이게 삶이고 이게 BOTY 1위지 ㅋㅋㅋ
이 BOTY는 책 얘기를 너무너무 하고 싶은 제가 꾸역꾸역 싸는 똥 같은 겁니다.
그래도 독서 얘기라고, 괜히 폼 좀 잡으면서 의미와 맥락과 서사를 붙여보는 거죠.
그리고 또 사람은 원래 그렇게 "라떼는" 하면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나간 것에 의미를 붙이고, 그리고 그것들을 나중에 다시 꺼내보면서 킬킬대는 것.
그런 의미에서 2025년 독서도 양은 적지만, 서사라는 포장지가 붙었으니 의미가 있군요.
2026년 BOTY는 또 어떨까요? 그것은 모험을 통해 알아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