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소년의 대답에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의 허무맹랑한 꿈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소녀는 그 믿음의 무게를 느끼며, 기쁨과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소녀는 소년의 손을 이끌고 다시 자신의 다락방으로 향했다. 이전의 들뜬 분위기 대신, 이제는 진지한 사명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소녀는 둘이 함께 보았던 그 낡고 두꺼운 책을 조심스럽게 꺼내 세상의 지도가 그려진 마지막 장을 펼쳤다.
소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 세상의 지도가 그려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찢어내기 시작했다. 수 세기,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책의 일부가 분리되는, 바삭하고 슬픈 소리가 났다. 그것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소녀가 다락방에서 홀로 간직해 온 꿈의 근원이자, 소녀가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소녀는 찢어낸 지도를 소년에게 건넸다. 낡은 종이에는 희미한 잿빛으로 세상의 윤곽과 함께 동쪽 사막, 남쪽 숲, 북쪽 빙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동쪽 사막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봐, 이 사막 그림 옆의 태양 문양이 보이지? 책 속의 사막은 늘 이글거리는 뜨거움이 느껴졌어. 네가 뜨거움을 찾아야 하는 곳은 사막과 태양이 만나는 지점, 햇살이 가장 먼저 눈뜨는 곳이 아닐까?"
이어서 소녀는 남쪽 숲 부분을 짚었다.
"그리고 여기, 남쪽 숲의 중간에 마치 모든 뿌리가 뻗어져 나오는 것 같은 나무. 분명 이곳이 이 숲에서 가장 생명이 넘실거리는 곳, 세상의 모든 생명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근원일 거야"
마지막으로 북쪽 빙원을 가리켰다.
"고요함은 땅 위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 있나 봐. 땅속으로 향하는 이 소용돌이는 아마 빙원 어딘가에 숨겨진 어느 깊은 곳이 아닐까? 그곳이라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들 것 같아."
그것은 명확한 해답이 아닌, 소녀가 오랜 시간 동안 책을 보며 쌓아온 자신만의 가설이자 해석이었다. 마법과도 같은 이야기였지만, 소녀가 소년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신비한 마법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오랜 믿음이 담긴, 낡아빠진 종이 한 장뿐이었다.
"물론...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틀릴 수도 있어."
소년은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그녀가 쥐여준 낡은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가 평생을 들여다본 꿈이잖아. 틀릴 리 없어."
소년은 소녀가 찢어준, 세상의 지도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가치 있었다.
그날 오후,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묵묵히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물은 초라했다. 며칠을 버틸 수 있는 딱딱한 빵과 말린 고기, 낡은 가죽 물통, 밤이 되면 추위를 막아줄 해진 담요 한 장.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호신용이라기엔 너무 투박한 주머니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작은 배낭에 담았다.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세상이 가장 짙은 회색에 잠겨 있을 때, 소년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마을 어귀에는 소녀가 홀로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는 작은 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 몰래 가져왔어. 딱딱한 빵보다는 이게 더 나을 거야."
주머니 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빵과 말린 과일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조심해."
소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소년은 대답 대신, 굳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고마워."
소년이 짧게 대답했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약속과 믿음이 그들의 시선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다시 돌아보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등지고, 소녀가 건네준 한 장의 지도와 그녀의 믿음만을 품에 안은 채, 소년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거칠고 막막한 잿빛 황야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