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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Nov 16. 2024

씨앗에서 씨앗으로

씨앗의 한살이를 돌아보는 입동 절기

우리 동네에는 철마다 꽃을 심고 가꾸는 부지런한 가드너들이 살고 있습니다. 마당 안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놓은 집도 있고, 동화책에 나오는 비밀의 화원처럼 사시사철 꽃이 지지 않게 가꾸는 집도 있습니다. 산책을 하며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심어 놓은 다양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동네에서 누리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담 위에 모과를 쪼르르 올려놓은 집도 있네요. 주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왠지 모과 향이 나는 마음씨를 지녔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산책 갈 때 주머니에 작은 통을 들고나갑니다. 혹시나 꽃씨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씨앗도 다른 물건들처럼 돈만 주면 인터넷이든 화원이든 얼마든지 쉽게 살 수도 있지만, 사지 않고도 구할 수 있다면 더 값지게 생각되지요. 잘 익은 씨앗을 조심스레 받다 보면 제가 왠지 조금은 더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답니다.


엊그제는 높은 담장 대신에 편백나무로 울타리를 친 이웃집으로 새깃 유홍초 씨앗을 받으러 갔습니다. 몇 달 전, 그 편백나무 초록잎들 사이사이로 감고 올라왔던 빨간 유홍초를 내년에는 우리 집 앵두나무에서도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뿔싸! 제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사이, 바지런한 집주인은 편백나무를 깔끔하게도 정리해 버렸네요. 가장 작은 키에 일자로 맞춰 잘라서 울타리는 낮아지고 깨끗해졌지만, 어울려 살던 유홍초까지 다 함께 잘려 나갔네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오면서, 입동 절기에 쓰는 3학년 아이들 글쓰기 주제는 '씨앗의 한살이'로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텃밭에는 배추와 무, 쪽파 같은 작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심어 놓은 메리골드는 아직 꽃지만, 일찍 씨앗을 품은 것도 있어요. 텃밭에서 만나는 작물이나 꽃의 씨앗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근데요, 배추는 원래 씨가 없는데요?"

일곱 명 모두 배추는 씨가 없다는 데 손을 듭니다. 직접 모종을 심었고 벌레를 잡아주면서 열심히 키우고 있는 배추지만, 그 배추가 어디에서부터 는지는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김장철에 따서 김치를 담그기는 했어도, 배추에서 꽃이 피고 씨앗을 맺는 과정을 본 적은 없으니 '배추는 원래 씨앗이 없었다'는 말도 이해는 됩니다.

"얘들아, 씨앗 없이 태어나는 생명이 있을까? 사람도 아빠 씨앗을 엄마 밭에 심어 태어나는 건데?"

우리가 보지 못했어도, 식물들은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씨앗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린이 산책 수업](김성호/우리 학교)이라는 멋진 책에 써진 내용도 읽어 주었습니다.

봄과 여름에도 열매가 달리지만, 가을에 가장 다양한 종류의 열매가 맺히지. 그럼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일까? 맺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맺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멀리 떠나보내는 거야. 자연에 깃들인 생명들의 생물학적 존재 이유는 번식이야. 번식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지.
생물이 번식에 성공하기 위하여 짜내는 전략은 정말 놀라워. 그중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어떻게든 씨앗을 멀리 퍼뜨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진단다.
식물이 씨앗을 맺어 자신의 발밑에 떨어뜨리면 그 씨앗은 싹트지 않아. 싹이 트는 데 필요한 물, 햇빛, 영양분 등을 어미 식물에 빼앗기기 때문이지. 어미 식물 또한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에 씨나 열매를 멀리 퍼뜨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왔어. 식물이 어떻게 씨앗을 퍼뜨리는지 궁금하지?(59~60쪽 중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수현이가 감탄하듯 말합니다.

"나무가 천재네, 천재!"

텃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관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우현이는 씨앗을 멀리 보내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는지, 메리골드의 씨앗을 받아서 먼 데 뿌려 주느라 바쁩니다. 세빈이와 수인이는 배추 씨앗을, 다른 친구들은 메리골드 씨앗을 주제로 글을 씁니다. 주연이가 쓴 씨앗의 여행기에서는 얼핏 성경에 나오는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안녕? 나는 메리골드의 씨앗이야. 나는 메리골드와 함께 살다가 꿀벌이 나를 등에 놓고 어디론가 갔어. 계속계속 가다가 나는 어딘가에 떨어졌어. 바닥은 딱딱한 회색이고 사람과 차가 북적거렸어. 나는 너무 당황하고 무서웠어. 그때 다행스럽게도 어디선가 바람이 아주 힘차게 불었어. 나는 아주 멀리 날아갔어. 가다 보니 드넓은 들판이 있었어. 나는 그곳에 있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어. 그런데 바람이 나의 신호를 알아들었나 본지 점점 약하게 불다가 결국 잠잠해졌어. 그 후 따뜻한 해가 쬐었어. 나는 깜빡 잠이 들었어. 잠을 자고 있는데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어. 나는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며칠 뒤 비가 그쳤어. 그런데 내 몸이 뭔가 바뀐 것 같았어. 나의 몸 끝에 꼬리 같은 짧은 실이 나오고, 머리 쪽에는 우리 엄마 같은 초록 잎사귀가 살짝 보이는 것 같았어. 흙 사이로 따스한 빛이 느껴져 당장이라도 나오고 싶어서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어. 드디어 밖에 나온 것 같았어. 밖 공기를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더 상쾌했지. 나는 몇 주일 동안 빗물을 마시고, 햇볕을 받으면서 쑥쑥 자랐어. 이제 나도 엄마 같은 어른이야. 나에게 꽃봉오리가 맺히고 어떤 곳은 꽃까지 폈어. 그 후로도 몇 주가 지나고 왠지 모르겠는데 힘이 푹 빠지는 것 같았어. 꽃이 지고 내 꽃이 씨앗으로 변했어. 이제는 내가 새 생명을 만들었다는 게 너무 기뻤어. 며칠 안 지나 내 씨앗들도 나를 떠나고 꽃을 피우러 갔어. 이제는 바람에도 쓰러질 정도로 약해졌어. 너무 힘들어. 그래도 건강하게 더 오래 살 거야. 그럼 안녕. / 주연
안녕? 나는 배추의 씨앗이야. 아마도 넌 내가 지금은 안 보일 거야. 내가 커 가는 과정 중 제일 싫었던 과정은 바로 내가 중근쯤 조금씩 커가는 과정이야. 그때 벌레들도 조금씩 날 야금야금 갉아먹었지. 내가 조금 큰 걸 보고 바로 달려들더라. 먹잇감을 노리다 갑자기 뛰어든 것처럼 말이지. 나도 그냥 날아가고 싶기도 하더라고. 좀 부러웠는데 근데 다행히 옆에 배추들도 있어서 어떨 땐 옆의 배추, 어떨 땐 나 이렇게 갉아먹어서 그래도 한결 나았어. 어떨 때는 운인지 내 배추 잎에 벌레가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어. 그런데 하루가 지나니 바로 내 거에만 딱 붙어서 갉아먹더라. 벌레들이 '작전을 짰나?'라고 생각을 해봤기도 했어. 제일 좋았던 과정은 배추가 아닌 그냥 싹이 조금 났을 때야. 그때는 벌레들이 하나도 안 와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나 봐. 그래서 그런 것 같아. 이제 편지를 마칠게. 그럼 안녕. / 수인

마당에는 꽃을 보거나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를 심고, 텃밭에는 식탁에 올라올 채소들을 얻기 위한 작물들이 주로 심깁니다. 꽃을 피우는 것만이 나무가 해야 할 전부가 아니듯, 먹을거리를 얻는 것만이 작물을 키우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는 씨앗에서 시작해서 씨앗으로 돌아가는 식물의 한살이를 모두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씨앗이 사라지는 날은 멸종의 날입니다. 씨앗을 갈무리하여 이듬해 다시 새로운 생명을 희망하는 것은 긴 겨울이 시작되는 이맘때 반드시 해두어야 할 일이고요. 게으름을 부리면 씨앗 받을 날을 놓치게 되고, 어둠이 너무 깊어지면 씨앗을 고르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자주 되새기자고 다짐합니다.


절기 그림과 글쓰기를 연결해서 했더니 그림에 정성이 듬뿍 들어갔네요.
작년만 해도 입동 절기가 꽤 쌀쌀했는데, 올해는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네요. 해는 짧아졌는데 날씨는 그대로. 절기 따라 살아가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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