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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십 대 시절 기억 3.

-조상님들도 좋아하실 거야-

by 뚜와소나무

초록색 대문이 있는 집에서 하숙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여고생이었다.


집주인은 남다른 포스의 여자 대장부였고 지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평소 자주 책을 읽고,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놓고 칸초네를 듣는 것은 물론

지인들과 차를 마시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나이는 당시 우리 엄마와 비슷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1년에 하루 이틀 제사 지내는 날만 잠깐 집에 들렀다가 떠나는 사람이었다.

사업하다가 망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어느 날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주머니께서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무슨 일인지 몹시 바빠 보였다.

머리에 네다섯 개의 구르프를 말고서

목욕탕에서 급히 달려온 탓에 땀을 흘리고 계셨다.

우리 셋은 배달된 짜장면 앞에서 ‘이게 웬 떡이냐!’며 즐거워했다.

맛있게 먹고 나서야

오늘이 이 집 조상님들 제삿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 즈음 열린 안방에 큰 상이 차려져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았다. 제사상에 올라간 음식들을.

거기엔 햄버거, 파인애플, 탕수육 등

내가 아는 그 누구네 제사상에서도 본 적 없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제기에 담겨 있지도 않았다.

하숙집에서 제일 비싸고 멋진 서양식 접시에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술도 없었다. 술 대신 콜라가 있었다.

1980년대 이런 제사상이라니...



뜨악! 놀란 나의 표정이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상님들도 우리하고 입맛이 비슷할 거야.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음식도 드셔보셔야지.

우리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니 조상님들도 잘 드시겠지. “

그날 다녀간 조상님들이 체하셨는지 아니면 아주 만족하셨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10년간 하숙하면서 만난 여러 아주머니 중 이 분이 최고로 멋있었다.

고지식했던 나의 내면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 대신

이면에 있는 본질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초록대문이 있는 집에서

나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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