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세상 모든 부부들에게는 각자 자신들만의 고유한 소통방식이 있게 마련이다. 언어라면 좋겠으나 문자든 몸이든 취미든 쇼핑이든 소통 방법이 있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 관계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 경우에는 음주. 주량이 약한 나와 상당했던(안타깝지만 분명한 과거형) 저쪽 간 격차는 이미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주종을 각자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마신다. 원칙은 휴일 전야. 반드시 한 테이블에서. 우리 집은 전날 뭘로 얼마나 심하게 싸웠든, 무슨 난리를 쳤든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금요일 저녁이면 마주 앉아 먹고 마신다. 준비는 퇴근 무렵부터다.(사실 오후부터) 유일하게 상시 소통하는 메신저상 가벼운 흥분이 흐르고 몇 백번 비슷하게 오갔던 몇 마디를 반복한다. 먹고 싶은 것 없수, 뭐든 좋아. 별 것 없으면 치킨이지. 나 피자 쿠폰 생겼다ㅎ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소통. 그렇게 시작해 오늘 안주가 정해지고 서로 사 올만한 추가 재료와 주종별 냉장고 재고 상태에 대해서도 체크한다. 그리고 최종 가족 구성원 전원 귀가 시간 파악. 그렇게 준비는 대략 끝나고 퇴근길에는 좀 설렌다. 배달음식에 대한 기대감인지 휴일 시작에 대한 즐거움인지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서로 간 냉각기일 때도, 각종 걱정거리가 있는 때에도 조금은 여유를 찾게 된다.
귀갓길에 사소한 만담이 몇 차례 더 오가고 일찍 도착한 쪽이 자연스레 모든 식탁 세팅을 마친다. 그리고 남은 구성원 둘이 속속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 본격적인 불금 시작이다. 맛있는 식사 시간인 동시에 공식 음주 시작.
가벼운 흥분 속에 첫 잔을 치고 나면 다음 잔부터는 각자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재량껏 마신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다. 그리고 일주일간 쌓인 각자의 스트레스를 각자 방식대로 떠들기 시작한다. 한 없이. 웃긴 것은 구성원 전원이 제 할 말만 떠들 뿐 (절대!)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빠르면 바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정 소통이 삐걱대고 지난밤에 말하지 않았느냐며 뭘로 들었냐는 공격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공식 음주 시작 후 30분까지는 화기애애하다. 급기야 서로 잔을 채워주거나 맛있는 안주를 집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나는 기분은 대체로 거기까지. 그 뒤로는 각자 하고 싶은 얘기에(만) 열을 올린다. 주요 내용은 내가 얼마나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느냐이며 자연스레 이어지는 내용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 집안 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음을 서로에게 강조한다. 심지어 이 부분은 최연소 구성원인 미성년자까지 동참해 목 놓아 성토할 정도다. 본인은 학교는 물론 학원 숙제가 잔뜩 있고 방과 후 발표 준비가 바빴음에도 방청소와 가방 정리를 열심히 했으며 블라블라. 미성년자가 하는 말이든 성인이 하는 말이든 나 이외 구성원이 하는 말들은 대략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그래그래, 고생했어. 어느새 2시간이 후루룩 흘러가고 식탁 위로는 빈 병과 빈 캔, 자극적인 소스와 기름 냄새가 남아 맴돈다. 우리는 여전히 시끄럽다. 블라블라 블라블라. 힘든 한 주였다고. 정말이지. 나야말로. 난 완전히.
민망하지만 쓰고 보니 이것이 제대로 된 부부 소통방식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긴 한다. 고유하기는커녕 소통이기는 한가 그저 음주 기회뿐 아닌가. 뒤늦은 변명일지언정 조금 보충해 보자. 사실 이 시간은 부부 각자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자 휴식의 의미도 크다. 어쩌면 부부 소통은 거기에 올려진 토핑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 토핑의 존재에 의미를 두자면 그것은 안심, 또는 서로에 대한 확인이 아닐까 싶다. 나와 너, 우리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없으며 우리는 즉 우리 관계는 무탈하다는 최소한의 확인. 적어도 지금은(아직은) 말이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고 당신에게 나를 이대로 드러내도 된다는 확인. 아직 우리는 서로에게 그럴 수 있는 관계라는 확인. 그런 사소한 확인이 쌓여 신뢰가 되고 확신이 되는 것 아니던가.
잔을 기울일수록 확인은 구체화되고 실증화된다. 술을 마시는 동안 변해갈 상대방의 사소한 것들을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다. 특히나 코로나 감염병 시기 이후 집술이 기본이 된 우리 부부에게는 모든 환경이 그러하다. 마시는 중 눈앞에 보이는 것에 새로움이란 1도 없다. 곧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안주를 더 원할지, 연중 이 시기쯤엔 어떤 이야기를 꺼내는지. 저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안색이 어떻게 될지. 심지어 젓가락이나 포크로 먹던 안주를 손으로 집어 먹기 시작하면 제대로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은 형식만 의문문일 뿐 ‘내가 듣고 싶은 말로 부탁해’ 같은 프롬프트다. 양측 대퇴부가 균형을 잃고 앉은 자세에 어깨가 기울기 시작하면 곧 들어가 누워야 한다는 뜻이다. 딱하게도 99% 이상 예측 가능하다. 나쁘게 말하면 한없이 지겹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또 확인하는 그 과정은 안정감이기도 하다.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나른해져 있다. 최근 추세로는 내가 먼저 잔을 멈추는 경우가 늘고 있다. 몽롱해져 가는 정신으로 취해가는 상대방을 보면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비슷한 생각을 반복한다. 오늘 밤도 저 모습을 보는구나. 이렇게 한 주가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나간다. 오늘 같은 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이렇게 늙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
어느새 한 주는 참을만했던 한 주로 지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시게 된다. 서로를 위해 각자를 위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