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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내가 내가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볼멘소리를 하거나 깜짝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뭘 하는지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인생에서 뭔가 아쉬운 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최고의 문학상으로 빛나는 맨부커상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소설이다. 수상작을 모두 읽을 여력이 내겐 없기도 하지만 너무 뒤늦게 읽은 지금, 대어를 놓친 기분이랄까.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중년이 된 지금 알맞게 소화되는 독서였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150페이지가량의 짧은 소설이지만, 두 번을 천천히 읽을 정도로 사유의 무게는 만만찮았다. 사실 소설을 두 번이나 읽은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스토리가 던지는 무게감, 책임감이라고 해야 적절할까..



이 소설은 개인의 삶과 시간과 기억이라는 문제를 역사와 개인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있다는 것과 인간의 조건과 자유에 대한 성찰을 논한다는 점에서 가치 있게 느껴진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역사를 배운다. 수많은 역사들을 연대순으로 빠짐없이 수업을 통해 의심 없이 주입하며 암기한다. 하지만 시험을 위해 강박으로 외운 역사에서 우리는 이 사건들은 진실일까 생각한 적이 작지 않다. 단지 이러한 갈증들은 각색된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통해 잠시 해갈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 개인의 역사또한 모든 관계 속 사람들과 통일된 감정으로 기억될 것인가 자신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학창 시절 '에이드리언'은 역사에 대한 교수의 질의에 이렇게 답변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에이드리언의 말처럼 역사는 당시 역사학자의 개인적 해석이 담긴 '허구'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한 개인의 역사도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의 기억일지라도 망상이 곁들여진 허구에 아름답게 각색한 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내가 안정적으로 평화롭다면 지난 과거는 자수성가를 뒷받침해 주는 스토리로 변질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뿐만 아니라 성공스토리에 어울리지 않은 스토리가 있다면 축소하거나 기억에서 삭제되었을 소지가 높다.



소설로 돌아가서 치명적인 오류를 가져온 기억의 문제는 주인공 '토니'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미래를 결정지었던 무시무시한 예언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기 전까지다. 그전까지는 전혀 기억에도 없었다! 토니는 증거의 편지가 나왔음에도 치기 어린 시기의 분노쯤으로 가볍게 응수하지만 친구의 자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천재친구 에이드리언은 필연의 저주를 거부할 방법이 죽음이라는 자기 소멸이었으니 말이다.



예순 살 화자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초대장을 받고서야 사십여 년 전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한다. 당시의 화면들, 친구가 했던 말들, 베로니카의 표정들, 포드 여사의 제스처들..



주인공 '토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의 노년의 모습이다. 매력 없고 소심해서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토니를 주인공인 화자로 내세웠다. 토니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말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수없이 논한다. 지금 쓰는 기록 역시 자기 인생을 논하고 싶은 갈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을 누구에게 비칠 기록으로 쓰일 이유가 있을까 싶다.



내가 내가 되는 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 이 책에서 얻은 나의 결론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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