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적 사유의 재해석



인간소외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하지요. 그런데 카프카의 <변신>이 상징하고 있는 현대인의 인간소외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 어린 자식이나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는 것에도 알고 보면 모든 가치를 오직 하나의 가치, 곧 경제적 가치로 바꾸어 계산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지요.

자본주의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개인의 이기심과 체계적인 이윤 추구의 정당화'입니다. 인류 역사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 특히 그것이 전지구화(globalization)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제외하면 개인의 이기심과 이윤 추구가 이처럼 정당하게 인정받은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이기심은 지탄의 대상이었고,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돈을 세었지요. 그런데 이들을 밝은 빛으로 끌어내어, 그 몸에 홍포를 입히고 그 머리에 황금관을 씌워준 것이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_변신 ' 해석 본문 中




우리가 한 번쯤 접해 읽었을 세기의 문학작품들에게 철학적 해석을 붙인 독특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문학에 접근하는 철학적 방법이 이렇게 삶의 본질을 재해석해준다는 사실을 느끼자 새삼 철학이 아름다운 학문이란 생각마저 든다.

지난 세월 동안 읽었던 문학작품들을 내 마음대로 규정짓고 이해한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동안 나는 문학 작품의 줄거리 해석과 저자의 의도에만 집중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김용규 씨는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을 들어보라고 권한다. 바라보는 시선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제라도 줄거리만 이해하는 협소한 지식에서 벗어나야겠다.

저자가 선정한 문학들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던진 주제들은 다양하면서도 의미가 깊다. 우리가 인생이란 큰 바다에 항해하며 외롭게 던졌던 개인의 질문들로 시작해 사회라는 조직과 국가에서 살면서 의미 있게 바라보며 살아야 할 철학적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이 책은 목차대로 개인 -> 가족 -> 조직 -> 사회 -> 국가로 범위를 넓혀 사유를 던지고 있다.

살면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개인적 철학적 사유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청소년시절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의외로 많이 했던 것 같다. 정말 착하게만 살면 죽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성당을 열심히 다니다 한 주라도 빠지면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데미안'과 '파우스트'를 읽었고 슬그머니 성당의 발길을 끊었다. 핑계가 생긴 것이다. 이제와 저자의 철학적 해석을 읽어보니 웃음이 나온다. 철없는 독서시절 결론이었던 책 속의 내용은, 단지 18, 19세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에서 파생된 창조물이었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낭만주의'의 매력은 '추상적 개인'에서 '구체적 인간'의 발견이란 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린 왕자'와 '오셀로'의 저자의 해석은 만남과 사랑에 대한 고찰이다. '길들여진다'의 글귀로 유명한 '어린 왕자'에서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는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관계'로 정의했다. 혼자서는 발전되지 않는 '나-너'의 관계. 우리는 매일 낯선 이들과 거리에서 직장에서 만나지만 모두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진정한 만남'의 의미해석이 좋았다.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다 말하는 내가 별과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오셀로'에서 상대의 소유욕구는 불안과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다시금 상기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이란 '하는 것'이지 '갖는 것'이 아니며, 그 대상은 '행위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란 것.

현대인의 고독, 소외, 가난한 이의 고립감, 무가치.. 이런 현실적인 냉혹한 고민을 다룬 작품들은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서구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이후 나오기 시작한다. 저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존재감이 사라진 세태의 문학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나는 '변신'이란 책소개가 오래 남는다.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이 경제적인 가치로 계산하게 되면서, 개인의 이기심과 기업의 이윤추구가 정당화되면서 개인의 존재감은 형태가 흐려져 간다. 가족의 부양하던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자 가족들에겐 '기생자'로 탈바꿈되었고, 결국 가족들의 냉대와 폭력, 증오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다는 내용은 현대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줄거리다. 보험금을 타내려고 가족을 버리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소외는 자본주의 본질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영화 - 집으로'의 거론은 시의적절했다.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가족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해석해 준 '샤르트르- 구토',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카뮈-페스트' 등 기억에서 의미 있게 정리되지 않은 문학작품들에 철학적 해석을 붙여준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참,  가정조차 하기 싫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들까지..


저자의 교양공유에 감사함을 느끼며 마무리한다.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당신의 기억 속 문학작품의 재정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 김용규 저>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