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간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혼의 붕괴를 수용할 만한 병원은 아직 충분치 않다.


- 분문 中




열심히 일하며 사는데, 자신은 소모되기만 하는 것 같고 그럼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 굴레 속에서 무기력감을 느끼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에리히 프롬'이 답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조교이자 국제 에리히 프롬 협회의 이사이자 정신과 전문의 '라이너 풍크'가 에리히 프롬이 1930년대부터 쓴 강연록, 논문, 저서의 글을 모은 책을 토대로 엮어냈다.


현대인은 무기력을 질병처럼 삶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다. 신경정신과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자신의 무기력에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여러 가지 고통으로 호소하기에 이른다.  프롬은 그 원인을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하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하지만 이는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리에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하더라도 타인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부모의 강요, 주변의 권유 등의 기대부흥은 그들의 인정을 받아내고 안전을 선물 받는 셈이다.


인간의 존엄과 실존을 강조했던 지난 세기는 18세기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술의 혁신만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정의를 내렸다. 최대 생산의 기초를 닦은 기계혁명은 사람의 기계화로 이어졌고, 보다 많은 생산은 보다 많은 소비라는 속도전의 자본주의 열차 위에 우리는 어느 순간 탑승해 버렸다. 프롬은 그런 우리들을 엄청난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자 젖병과 사과를 기다리는 영원한 신생아로 표현했다. 창고는 상품의 재고들로 넘쳐나도 여전히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 또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출근하고 일한다.


우리는 자신을 탐구하며 자아를 찾는 일에는 점점 관심을 잃어간다. 오락 산업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세계는 자연체험보다 더 흥미롭고 스릴이 넘치기 때문이다. 급기야 인간이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기업은 인간의 욕구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는 마케팅에 열을 올리며 현대인의 욕망을 채워준다. 그는 현대인이 왜 무기력감을 느끼는가, 그것은 진짜 삶을 살고 있지 않아서라고 강조한다. 만약 이대로 산다면 점점 더 깊은 무기력감에 빠질 것이라고.


프롬은 '진짜 삶'을 살라고 재차 당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진짜 삶일까? 진짜와 허울의 차이는 남과 다르게 살려는 용기다.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려면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쉬운 명제 같지만 관습 속 지식의 탑을 쌓고 성장한 어른들은 곤란하게 들릴 뿐이다.


프롬이 강조하는 '진짜 삶'은 니체의 정신발달 3단계 중 최종단계인 '어린아이의 정신'에 해당된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라 느낄 때 '힘듦'을 말하듯이 '고정관념'과 지식의 '편견'은 '낙타와 사자의 정신세계'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들은 굴러가는 공 하나에도 웃음을 터트리고 하루종일 즐겁게 가지고 논다. 어른들은 아이의 '감탄'을 싱겁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만의 능력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지식의 경험습득으로 잃어버렸던 세상을 바라봤던 '감탄'이다. 섣부른 판단을 보류하고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자기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집중하는 순간을 찾아보는 것, 갈등과 긴장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성격을 개발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런 훈련과 삶을 대하는 노력을 반복하다 보면 진짜 삶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는 것.


프롬은 '진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양 떼들 무리에 있는 삶을 택하느냐, 그냥 한 마리의 양이 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겠지만 이 책을 읽은 후의 독자라면 그의 예리한 통찰에 후련한 기분을 경험하리라 믿는다.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의 한 끗 차이는 노력뿐이다.


우리 집 얘기를 하자면, 우리 아이들은 학원 하나 가지 않고도 우수한 대학에 들어갔다.  나도 아이들도 주도적인 스스로의 학습이 주는 효과를 믿었다. 자발성이 주는 공부의 효과는 진지한 학문의 열의로 이어졌던 경험이었다. 학원을 오가는 시간과 학원에서 다시금 주입되는 지식은 탄탄한 학문의 열의를 삭감시킨다. 스스로 노력해 도달하는 공부는 짜릿한 성취감과 평정심을 주고, 가짜 사고와 가짜 의지는 무기력을 선물한다.  그렇게 당당히 입학한 학교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 아닐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갈등의 능력을 갖추는 것은 한 번뿐인 삶에 가장 효과적인 대처다.


프롬의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은 니체의 '자유 의지'와 상통하는 것을 느낀다. 외부환경이나 타인의 힘의 작용의 압력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 때로 살아가며 창조하며  깨우치는 능동적인 삶의 주체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옳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