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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나의 옳음이 야만이 될지 모른다


몇몇 사람들은 2020년대 말에 이르면 합성 버거의 가격이 일반 버거보다 낮아질 것이라 추정한다. 버거킹은 '임파서블 버거'를 이미 판매 중이다. 실험실에서 생장시킨 고기의 맛이 기존 고기의 맛과 같거나 더 낫고, 또 동물을 여러 해 동안 키워서 도살한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윤리 기준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본문 中



정신이 번쩍 든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무엇이 옳은가"라고 써져 있는 책 표지를 한동안 멍하니 보게 만든다. 그동안 '확신'처럼 갖고 있던 옳음에 대한 정의가 기술의 발전 앞에서는 언제고 바뀔 수 있는 시한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일 것이다. 미래독서를 한 기분이 이럴까. 단지 저자의 공상적인 제시가 아닌 철저한 자료제시와 학자적 판단이 겸비된 책이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기술과 더불어 윤리적 가치관이 또 얼마나 변화무쌍할까 기대와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까지 들게 하는 독서였다. 안 읽어본 분들은 필히 읽기를 추천드린다.


저자 "후안 엔리케스"는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의 최고의 교수이자 TED가 사랑하는 미래학자다. 권위 있는 대학의 학자답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하여 우리는 윤리적 대안을 갖고 맞이해야 한다며 이 책을 통해 토론제안을 하고 있다. 윤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옳았던 것이 현재는 폭력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야만으로 비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윤리적 변화라면 노예제도, 인종차별등이 있다. 당시에는 당연한 권리로 시선으로 살았던 제도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존엄이 살아난 케이스다. 하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검토해 봐도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데는 생각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일테르면 노예제도 폐지를 외치며 내전을 일으켰던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은 승리와 더불어 흑인의 차별이 없어졌을까. 아니다.


최근 1967년까지만 해도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기술이 인간의 생활에 파고든 효과라 해석하고 있다. TV와 라디오에서 흑인가족이 등장하고 흑인 코미디언이 인기를 끌고 흑인야구선수가 각 가정의 거실로 불러들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야말로 사람의 감성을 바꾸는 최고의 방향제란 생각이 든다.


사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나는 기술의 발전 중에서 누구나 쉽게 사 먹는 햄버거의 패트를 실험실에서 "생장"한 것이 실용화가 될 것이라는 글에 많이 놀랐다. 2013년 네덜란드 생체조작공학자가 최초로 햄버거의 패트를 만들 때 기술의 가격의 38만 달러 (한화 4억 원가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2020년대 말에 이르면 합성 버거의 가격이 일반 버거보다 낮아질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축된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미래세대 대부분은 동물을 먹지 않을 테고, 고기를 삼키는 행위를 한 지금 세대의 사람들을 후손들은 끔찍하게 혐오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농업의 대량생산을 위해 필요했던 노예제도는 당시에는 필요한 재화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빠른 산업화로 농업의 의존도가 낮아지자 노예제도 관행이 금지된 것이다. 동성애 역시 당시에는 사이코패스적 인격장애로 분류되어 질타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미디어 기술발달로 인해 그들의 성적 가치관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또 하나 많은 여성들의 시선이 멈췄을 '인공자궁'에 대한 내용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앞으로는 여성이 힘들게 임신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태아와 산모의 몸이 분리된다는 의미다. 인간 복제에 대한 도덕적 용인은 어디까지일까. 체외수정은 유전자 편집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윤리적 허용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산모의 건강과 사회적 활동, 악성 유전자를 사전에 편집한다는 이점이 부각되어서인지 인간복제의 도덕적 용인을 허용하는 수치가 늘고 있다. 그러니 우리 후손들은 점차 복제와 유전자 '교정'및 개선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로 여길 것이다. 저자는 유전자적 결함을 알고도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로부터 부족한 당신의 판단에 대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상해죄'를 물어 고소를 당할 것이라 했다. 상상만 해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고민으로 이마를 짚게 만든다.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남겨줘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학의 발전, 기술의 발전은 후손들을 우리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살게 만들까.


과학의 발전으로 지구의 생존나이를 알게 된 우리는 더욱 다른 행성을 찾고 있다. 태양의 수명이 50억 년 뒤라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지구도 태양 따라 자연소멸될 것이다. 단순히 지금은 우주여행이란 명분으로 우주를 바라보지만 종국엔 인간의 지구탈출을 꿈꾸고 있다. (아래 인용문 참조)


사람의 신체는 아무리 방호복으로 보호한다 해도 진화 과정에서 경험한 바 없는 환경에 대해선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기술들을 사용하여 화성보다 먼 행성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다. 태양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행성도 인간에게는 '편안한 집'이 될 수 없다. 설령 산소와 이산화탄소와 농도 변화폭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대기 환경이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아낸다 해도 생존은 어렵다. 상대적인 방사선량과 24시간 주기 그리고 정말로 낯설기 짝이 없는 동식물들과 질병이 널려 있는 조건이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뇌'에 대한 실험이 이미 꽤 진척이 된 상태란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인간의 피부세포와 화학물질을 섞어 줄기세포를 만들어 낸 미니 뇌(오가노이드 organoid) 글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이미 인간 뇌 오가노이드를 쥐의 뇌 속에 넣어 우주로 내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미니 뇌는 한층 큰 공모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니 우주에서 태어난 아기의 뇌는 지상의 인간 뇌와 같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도 윤리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 뇌 지도 작성과정에서 뇌 기능에 개입되는 다수의 기술에 대해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디까지 뇌 기능 조절을 허용할 것인가.


저자는 이밖에도 사회제도에 대한 시스템도 문제제기한다. 책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인데, 미국이란 나라가 이제 더 이상 아메리칸드림을 꿈꿀 곳이 아니란 것이었다. 영리법인으로 민영화된 병원들과 감옥들로 인해 국가는 이미 비즈니스로 전락하여 시민들의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리 민간 회사로 바뀐 사회제도 속에서 기관들은 비윤리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고, 일반 시민들은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질타하고 있다.


현대 국가의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은 시민에게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선진국은 무장강도의 수가 훨씬 적다. 그러나 미국에선 "꼼짝 말고 손 들어!" 하는 고함소리가 자주 들린다. 길거리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약사와 의사 그리고 기업 이사가 약병을 손에 들고선 "돈을 내놓을래, 목숨을 내놓을래?"라고 말하는 카툰의 묘사가 설득력을 가질 정도니까.




자본주의 병폐의 끝판을 보고 있는 미국의 사회제도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는 지금 미국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시민에게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사회적 양극화, 계급화가 되어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심각해서 마음이 아팠다. 자본주의는 승자독식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미국 상위 1퍼센트의 재산이 하위 90퍼센트가 가진 재산의 총합보다도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윤리냐고. 이제는 생산, 재화의 효율성이 아닌 '분배'가 윤리적 잣대로 고민해야 한다고. 너무나 훌륭하고 맞는 말 아닌가.


우리의 윤리관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화하고 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옮음'으로 확신했던 모든 사안에 대하여 성급한 윤리적인 잣대는 위험하다. 이 책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과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고 윤리적 딜레마들을 심도 있게 토론해 가며 해답을 찾기를 권하고 있다. 나는 아주 고무적으로 읽었다. 좋은 책이다.  


<무엇이 옳은가 / 후안 엔리케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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