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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인간은 잘 믿는 동물이고,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우리는 좌파건 우파건 그 어느 쪽에서도 교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자유, 학문의 자유, 상호 관용의 가치를 굳게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지만 기술적으로는 통합된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특유의 분석철학이 돋보이는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세계가 세 갈로 찢어져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 출간했던 '서양철학사'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나왔다. 그러니까 나치의 대학살을 겪고 소련이 대두하는 상황으로 사회가 극심하게 불안해진 시기다.



러셀은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강력하게 믿고 그 믿음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비판적 사고의 부재를 실감한다. 세계가 광기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 아님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비판적 사고의 회복을 위해 건강한 질문과 함께 건강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은 것으로 보이며, 불확실한 체로 남겨놓지 않기 위해 그만의 논리적인 분석철학을 담아 이 책을 썼다.



세기의 철학자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은 대단한 필력이 압권인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행동하는 이성주의자로 말년에까지 지치지 않고 반핵, 반전 운동에 참여하였고 감옥에 갈 만큼 어두운 시대에 맞서 뜨거운 열정을 실천한 사람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증명한 세기의 천재는 실행가로 자신을 증명했고 사람들에게 영감과 정의를 보여줬다.



이 책의 원제는 '인기 없는 에세이 Unpopular Essays'지만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라는 제목도 훌륭하다. '생각을 잃어버린'이란 뜻은 맹목적인 태도 즉 무비판적인 충실함을 의미한다. 그는 전쟁, 교조주의, 이념의 갈등, 종교, 교육 등 여러 주제에 대한 독단과 맹목, 권위 같은 떨쳐야 할 허영들을 꼬집으며 비판적 사고야말로 세상의 거짓과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강조하며 우리를 진실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그리고 종교적 맹신 등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로 인해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고 보았다. 특히 중심에 흐르는 교조주의(관념론)는 몰려다니는 양 떼가 되어 인간의 이성은 물론 비판적 사고를 중단해 버린다고 보았다.



교조주의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문명에서부터 중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지배한 철학에서 찾았다. '서양철학사'를 읽지 않고 도전한 나는 그리하여 난항에 부딪치게 되었고 책을 읽는 도중 두 책을 번갈아가며 이해했다.



고대에서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고대 철학은 과학과 정치와 종교가 혼재되어 움직였다. 고대 문명의 종교적. 정신적 토대인 원시신앙은 자연법칙과 흡사한 그리스식 자연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토속신앙의 광기는 절대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와 근대에 이르러 점차 과학과 종교가 분리되었고, 현대의 철학은 인간행동(윤리)으로 삶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쪽으로 축소되었다.



철학이 신학과 다른 점은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 측면은 같으나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철학의 이러한 범위 축소는 '변화'와 '진보'가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러셀은 변화는 과학적이고 진보는 윤리적이라 말하며 과학은 검증과 결과물로 입증되고 진보는 민주주의로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태생의 뿌리인 철학에 대해서는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로 보았다.



이 책은 경험론과 관념론에 대한 분석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였고 그 사고방식에서 일치한 유일한 철학을 '경험론'에서 찾았다.



경험론은 내가 이전에 경험한 것들이 맞다고만 믿는 것이 아니다. 흔히 과학에서 지식을 발견하는 태도처럼 관찰과 검증 그리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영원히 맞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계속 의심하며 나의 경험을 유보하며 이성적 실천을 위한 객관적 자료를 모으는 사상이다. 반면 관념론은 진리가 확고히 있다는 신념을 먼저 정하고 그것을 계속 증명해 나가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교조주의는 아는 것을 확신하고, 회의주의는 모르는 것을 확신한다.
철학이 해소해야 할 것은 지식이나 무지에 대한 확실성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에 있었던 너무나 비합리적이었던 행동들을 비판한다. 마녀사냥이나 유대인 대학살이 대표적일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행해지는 수많은 관행들도 훗날 적합한 믿음의 근거가 부족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태도인 것이다.



러셀은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의 근거에 자리하고 있는 독선의 관념인 '교조주의'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추종했던 철학자들의 소환하여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일 것이다. 러셀에게 비판받는 철학자들은 교조주의를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인물들이다.



교조주의 체제는 추정자들 간에 매우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이끌어 낸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중요한 사실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장착하고 광신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윤석열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폐쇄하려 했던 친위쿠데타를 목도했음에도 윤어게인(YOON AGAIN)을 외치는 사람들의 상상해 보라. 그들의 믿음의 근거는 상식적이지 않다.



'서양철학사'에서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먼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다는 대표적 인물을 필두로 많은 철학자들을 소환하고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다양성과 자유를 억누르는 국가론을 거론하며 억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플라톤은 철인이 통치하는 나라를 꿈꿨고 욕망이 절제되고 질서가 유지되기를 바랐지만 러셀에겐 전체주의로 비친 것이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전문가(엘리트) 통치'일 것이다. 러셀은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그 누구도 절대적 진리의 소유자가 될 수 없음을 꼬집는다. 열린 논쟁과 다원성을 인정하는 건강한 사회의 토대인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사상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헤겔이 이끄는 독일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으로 설명되는 자의적 권위에 대한 맹종을 외쳤고 절대 군주제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으로 유전되었다. 그들의 철학은 역사가 논리적 계획에 따라 발전한다는 믿음과 순수하게 추상적인 변증법처럼 자기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점이 함정이었다고 지적한다. 로크의 경험론을 대조하며 설명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교조주의를 따르는 종교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 믿는 사제들의 말을 대입한다면 유대인 학살도 신의 뜻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세상 만물 이치가 주의 뜻대로 된다는 믿음은 국가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모순과 대치된다. 그의 논리를 통해 무신론이 강조된다.



그는 '자유주의'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말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지주인 '존 스튜어트 밀'이 썼던 '자유론'의 내용과 그의 민주주의 자유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무분별하게 남을 따라가려는 습성과 남과 하나가 되려는 경향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확신의 과잉(교조주의)은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내용과 일치했다. 밀은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시장 자유주의를 예찬'한 인물이다.



실제로 자유주의의 실천적 신조는 나도 살고 너도 살게 하는 것이고, 공공질서가 허용하는 내에서 관용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정치 제도에서 중용을 지키고 광신을 피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인권존중,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다. 현대 사회 체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다. 러셀에게 자유주의는 독단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관용을 통해 타인을 공존하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다.



러셀의 말처럼 이념적 극단주의는 '광기의 시작'이다. 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이라 믿지만 실상은 감정과 선입견, 사회적 압력에 휩쓸려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집단적 어리석음으로 뭉친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믿기에 반대되는 사실이나 이성적 판단은 무시한다. 자기 믿음을 강화하는 확증편향적인 조건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조주의는 왜 위험한가.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논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조주의 추종자들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의 전쟁은 세계의 멸망을 의미할 뿐이다.





이들의 문제는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해 사회를 경직시키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성의 끈을 놓지 말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이들을 견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판적 사고는 무엇인가. 의심하고 유보하는 자세다. 하지만 마냥 유보하고 미적거리는 자세는 아니다. 토론하고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게 되면 두려움에 맞서 용기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법률과 법치가 있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체제라 강조하고 있지만 최선의 체제라고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절차를 악용하여 권력을 잡은 히틀러를 알고 있다.



민주주의자는 다수가 항상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고 믿을 필요가 없다. 그가 믿어야 하는 것은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다수결에 따른 결정은 다수가 다른 결정을 내릴 때까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평범한 사람의 지혜라는 신비로운 개념이 아니라, 자의적인 힘의 통치 대신 법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로 믿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허약하지만 그나마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제인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할지 질문하게 만든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은 토론과 경험에 의해 자신의 과오를 고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러셀은 교조주의에 굴복하지 말고 개인의 자유, 학문의 자유, 상호 관용의 가치를 굳게 믿으라고 강조한다. 그렇다. 이 믿음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붕괴 될 것이다.



러셀은 세계가 하나로 통합된 국제사회를 꿈꿨다. 당시 그는 세계를 하나로 이끌 나라로 개인의 자유와 관용이 있는 미국을 선택했는데 현재 트럼프의 독단적인 행동을 본다면 아마도 철회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민주주의는 지배자와 민중이 동등한 사회를 의미한다. 밀은 권력이 제한되고 급기야 필요 없어야 한다고 보았다. 권력은 횡포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전한 세상을 후손에게 넘겨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 이념, 교육 등 많은 부분 사고의 중요성을 느낀 시간이었다.





<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 / 버트런드 러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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