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적 비관론자로 살기
우리는 누구의 부축을 받지 않고도 똑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독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물망에 포획된 물고기처럼 관련 도서들을 찾아 읽게 된다. 이 책도 요 근래 읽었던 스토아철학 도서의 연장선상이다. 이번 도서는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부족했던 스토아철학의 중요한 신조, '미덕'에 대한 해설과 실천방향이 상세히 담겨있다.
스토아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미덕'을 실천하며 '본성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많은 훈련과 기술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운명은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에서 본질적인 영역을 맡고 있다. 이들은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때로는 삶과 죽음까지도 결정하는 행운과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의 모습을 종종 차용한다. 인간은 우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고 죽음조차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해석한다. 우리의 몸은 죽음을 통해 작은 단위로 분해되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삶의 과정 속에서 죽음이라는 결말을 스스로 준비하는 연습은 좋은 삶의 조건에 얽매여 있지 않게 만든다. 조건의 틀을 만들면 우리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괴로운 것은 지나치게 엄격히 구속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보자. 또 너무 낙관적으로만 바라본 실망일 수도 있다.
스토아인은 삶에 대해 비관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불시에 닥칠 수 있는 운명과 그로 인한 상실에 정서적으로 대비하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훈련을 하고 며칠 동안 적은 양과 간단한 음식을 먹었고 거칠고 낡은 옷으로 생활했다. 막상 그렇게 생활해 보니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의식적인 쾌락의 포기는 실용적인 수행법이라 생각이 든다. 거창하게 지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지위에 있으면서 평정심을 잃지 않은 철학자다. 그가 평정심을 잃지 않도록 쓴 '명상록'의 글은 웃음이 난다.
새벽에 일어나 스스로 이렇게 말해보라. 오늘 나는 째째하고 배은망덕하고 뻔뻔하고 거짓되며 질투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인 인간들을 만날 것이다.
세상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세상이 호의적이지 않다며 쉽게 실망하지 말고 미리 대비하고 무장하라는 스토아적 비관론자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다.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는 자세는 비관적이지만 현실적이다. 불성실한 사람은 신뢰를 저버릴 수 있는 상황을 언제든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2000년도 더 된 오래된 생각이지만 결코 낡은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경쟁하고 비교하며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는 현대인에게 단단하게 지켜줄 필요한 사상이라 본다. 지금도 뉴욕 고층 빌딩에서는 정기적인 스토아모임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토스의 고전에서 현대인의 멘털을 지킬 스토아적 사상을 건져냈고 현대의 언어로 풀어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떤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_에픽테토스
스토아철학은 일상생활과 의식적인 습관으로 유명하다. 명확하게 구조화된 일상과 일관된 마음가짐의 실천으로 사람들을 강화시킨다. 의식적인 개입이 없다면 우리는 항상 쉬운 방법과 단기적인 보상의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아인은 좋은 의사결정의 전제조건으로 '느린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부정적 시각화(최악의 상황 상상하기 또는 사전 부검), 정신적 손상의 최소화를 위해 대비하는 그들의 훈련은 장애와 역경에 대한 정신적 예측 수행이다. 이는 일전에 읽은 독서와 중첩되는 사항이라 패스하고 대신 자기 인식과 자기 조절 사색훈련법은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자기 인식과 자기 조절 사색훈련법
'세네카'는 어린 시절부터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찍 체험했고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으로 주인에게 구타를 많이 당해 한쪽 발을 절면서 평생 살아야 했다. 삶의 고통을 통해 두 철학자는 인생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결정이 있다'는 '자기 인식'의 깨달음이었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자유로운 세상이지만 엄격히 따지면 유전적 성향이나 신진대사, 병력, 유행병 감염등 우리의 신체는 완전한 내 통제에 있지 않다.
'죽음은 통제할 수 없지만 삶은 설계할 수 있다'의 '비탈리 카스넬슨' 저자는 이를 '통제 이분법'으로 말하며 뇌의 스트레스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내부요소(감정, 신념, 습관, 목표등)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요소(결과, 사람들의 평판)에는 관심을 멈추는 훈련을 하라고 조언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의 치료법으로 세네카는 '유예'를 권한다. 무조건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우선 차분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2002년 노벨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뇌의 특정 부분의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시스템 1'은 정신적 권총처럼 번개 같은 속도로 과거의 경험에 의한 즉각적 반응이다. 또 한 가지 '시스템 2'는 이성적 훈련을 통해 반응할 수 있는 부문인데 '느린 생각'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를 '자기 조절'로 표현하며 스토아적 훈련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내면의 불안감을 유발하는 자극에 대한 '분노'에 '충동유예'라는 처방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는 '내 통제 범위 밖에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감정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느린 성찰이 필요한데 이때 자신에게 이런 스토아적 자기 조절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1. 1년이 지나도 이 일이 여전히 중요할까?
2. 이 상황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분노'를 스토아인은 '일시적 광기'로 보았다. 성숙한 어른으로 살려면 충동을 유예할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본성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평온한 삶은 정신적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스토아철학에 경외심을 느낀다. 이토록 철저한 이성적 철학은 자기완성의 끝판왕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