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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가 말하는 작가의 소명이란



작가가 글을 쓰는 건 바로 '독자'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아닌, '당신'인 독자를 위해. '친애하는 독자'를 위해. ‘갈색 올빼미’와 ‘신’의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독자를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이상적인 독자는 누군가, 어떤 ‘한 사람’이지요. 독서라는 행위도 글을 쓰는 행위처럼 언제나 단수로 이루어지니까요.





'마거릿 애트우드'가 작가가 된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탄생한 책이다. 다양한 연령층과 작가에 입문하려고 준비 중인 전문가들까지 총 여섯 번의 강의를 취합하다 보니 쳅터 구성이 한 호흡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녀의 깊이 있는 다독의 문턱 앞에서 나는 부족한 이해력을 반성하며 반복 독서로 간신히 소화할 수 있었다.



부커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작가로 유명한 그녀의 작품들을 나는 왜 아직까지 한 권도 읽지 않았던가! 자세부터 부족한 내가 그녀의 강의를 먼저 듣는다. 이는 마치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솔깃한 광고를 보고 호기심에 강연장에 들렸는데 소개받은 강사가 세계적인 거장이라 놀란 기분과 같다.



글의 내용은 굉장히 알차고 탄탄해 한 자 한 자 소중히 읽힌다. 소개된 다수의 책들과 깊이 있게 해석하는 저자의 강의 내용을 문자 언어로 바꾸었지만 구어체적 느낌은 살아있다.



그녀는 문맹(文盲)이 지배하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일찍이 시인을 꿈꾸고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녀가 작가라는 삶을 선택하고 '작가'에 대한 소명을 확립하기까지 평탄하지 못한 길을 걸어왔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유익한 목적을 증명하려는 검열은 19세기 내내 예술의 올바른 기능에 대하여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시대를 이어오며 진행된 사회적 압박(게다가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미신까지)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핍박으로 이어오게 된다. 그들의 죄라면 인쇄해선 안 되는 단어를 썼을 뿐이었다.



책의 내용은 자전적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었던 초창기 경험에서부터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이중성 그리고 예술가라 여기는 사람들이 상업의 신(神)에게 자유롭지 못한 현실까지 이야기한다. 그로 인한 현실적 타협과 소명의식으로 자리하기까지 어두우면서도 지난한 여정은 작가의 삶과 함께 하는 듯하다.



과거에는 예술가(작가)란 가난하면서 진실한 예술가와 부유하면서 영혼을 팔아넘긴 예술가로 나뉜다는 신화가 굳어져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풍토에서 여성예술가의 생존은 기적과도 같았다. 핍박과 조롱 그리고 도덕적 예술의 강요 앞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은 항의하듯 펜의 전쟁을 선언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언어라는 힘을 믿은 작가들은 질긴 숙명처럼 강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소명은 무엇인가. 그녀는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인용한다.



예술가에게 도덕적 삶은 예술의 소재다.

(..)

예술가는 윤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윤리에 찬성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태도다. 예술가가 결코 불건전해서가 아니다. 선과 악은 예술가 위에 예술가에게 예술적 수단이다.

(..)

쓸모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그것을 열렬히 흠모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예술은 쓸모가 없다.




예술가로서 영혼은 '인간사'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인간화'를 언어로 표현하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완성한 작품 속 인물을 해석하고 판단하며 언어를 둘러싼 주변을 이해하게 된다. 독자는 읽은 글 조각들을 엮어 유기적인 완전체로 만드는 것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일까.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눈을 반짝인 청중에게 이런 대답을 해준다.



글 속에, 깊은 글 속에,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자리하기 그리고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해 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손톱만큼의 주제도 생각도 없이 있는 것. 이는 다시 한번 책 앞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광활한 백지, 잠재적 상태의 책, 무 앞에 자리 잡기. 살아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무언가,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힘든 무언가 앞에 있기.



글쓰기는 인간의 실존과 관련하여 행해지는 욕망과 충동의 행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러한 훌륭한 글쓰기의 사례는 수많은 작가들이 펼쳐놓은 작품들을 읽는 성실한 독자라면 수월할 것이다. 훌륭한 작가는 훌륭한 독자라는 의미다. 진정한 작가와 독자는 지면과 소통한다는 의미를 나는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공한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내가 원하던 대답을 해준다. 물론 돈이 만물의 척도가 된 세상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에 대해 그녀는 '구체적인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고 이야기를 꺼낸다.



구체적인 독자란 누구일까. 작가의 책을 소중히 간직하는 독자다. 책 속에 인물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변화시켰다 믿으며 인정한 독자다. 그녀는 50년 전에 쓴 자신의 책을 간직한 친구의 고모를 이야기하며 대중의 '그들'이 아닌 '당신'의 이상적인 독자(갈색 올빼미 등장한 책을 간직한 고모)를 위해 쓰라고 말한다. '이상적인 독자'란 구체적인 한 사람이자 '친애하는 독자'를 의미한다.



박완서작가는 글을 쓰는 순간에 대해 자신을 객관화하고 체험의 부피가 쌓여 더 이상 부력을 견디지 못할 때 글을 쓰게 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또 경험과 영감이 만날 때라고도 했다. 그런 진정성 있는 글이야 말로 작가가 그토록 원하던 이상적인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쓰기에 대하여 / 마거릿 애트우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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