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사태 1주기를 앞두고
어느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고 싶어 합니다. 이유는 가정폭력입니다. 그런데 가정폭력의 가해자인 남편은 지속적으로 '가족을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합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에도 본인은 가족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합니다.
늦은 시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멈춘 적이 있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가장이 뻔뻔스럽게도 이혼은 하고 싶지 않다며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었다. 그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만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사랑하는 것이지 가족 구성원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성원이 필요한 것이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에게 굴복하는 군대와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를 소유하고 싶었던 괴물 대통령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12월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한 날이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지만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와 내란세력들의 처벌은 속 터졌던 헌재의 판결처럼 지지부진하다. 그만큼 내란세력이 곳곳에 포진되어 보호받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절차의 과정을 이해하며 분노하는 심정을 누르며 지켜보는데 쉽지 않다.
'빛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란 이 책은 12.3 내란이 일어난 시기에 발간된 책이다. 법철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윤석열 정부의 무능한 실정과 친위쿠데타와 계엄해제과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빠르게 진화하는 현대에 있어 관찰자의 관점에서 사건에 참여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진리는 사건이 지난 후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
이제 진리는 정의와 불의가 충돌하는 거리의 교차로에서, 폭력과 사랑이 폭발하는 온-오프라인 광장에서 시민들이 구성하는 것입니다.
즉 사건의 참여자로서 12.3 계엄을 해석하고 해명하고 비판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명징하게 판단하는 그의 보수적인 원칙이 마음에 든다.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기준을 잡고 상황을 정확히 해석해 주는 지적인 사람이 선봉에 서야 한다고 보고있다. 계엄이 선포된 날 나는 절망스러운 마음이었지만 이재명 대표의 라이브방송을 보며 한가닥 희망을 보았었다. 국회로 뛰어가는 시민들은 위기에 누구를 바라보고 뛰어야 할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행동이었다.
그의 시대는 다행히 끝이 났다. 하지만 아직도 내란사건이 시원하게 판결되지 않았듯이 그의 탄생배경과 우리가 선택했던 오답노트를 점검하지 않는다면 불행은 반복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윤석열정부가 탄생하게 된 핵심 공약은 '법치주의 복원'이었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할 거라는 국민 다수의 마음이 강력하게 작동되어 그는 선출되었다. 법철학 연구자인 저자는 그가 법치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철저히 법률주의자였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법률주의와 법치주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수신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간단히 구분된다. 법치주의의 수신자는 '모든 시민과 국민'이다. 법은 공동의 삶을 조율하려는 시민의 뜻이자 권리로 행사된다. 반면 법률주의의 수신자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메시아처럼 기다리는 수동적 입장이다. 기존의 왕도정치에 기대어 측은지심을 바라는 것이다.
법률주의의 지배자는 당연히 법을 만드는 자다. 평생 검찰에 몸담았던 그였기에 사법국가를 꿈꾼 것이다. 법률주의가 가장 강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와 나치시절이었다. 전체주의 국가일수록 독재국가일수록 비정상적인 국가일수록 법률주의가 강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법률국가가 아니라 법치국가다. 우리는 속은 것이다.
윤석열정부의 체계적인 사고의 틀을 분석한 저자의 사건의 소환은 이해를 돕는다. 먼저 '입틀막' 사건이다. 윤석열은 여론의 비판을 받아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불편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합당한 경호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입틀막 사건을 자유라는 가치와 충돌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섬기는 과시적 공론장에서 취한 입틀막 사건에 대해 그들은 반국가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정당히 취한 조치로 보았다.
의대정원 확대정책은 양적 공리주의에 근거한 조잡한 결정이었다. 국가의 지평에서 모든 국민을 효율성을 중심으로 계산한 것이다. 양적 공리주의의 폭력성을 저자는 알게 쉽게 비유했다. 딸들에게 학교는 가지 말고 돈을 벌어 아들들이 대학교에 보내면 전체적으로 좋다는 식이란 것이다.
양적공리주의는 능력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능력 없는 사람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잣대로 변질될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특정집단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그 희생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집행하는 것은 어떤 문제점으로 이어질까.
시민사회가 공리주의에 기반한 정부 정책에 쉽게 동의하면 야경국가, 경찰국가가 만들어집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이익을 얻는데 다른 쪽의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사람들의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집니다.
더구나 국가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들조차도 스스로가 저들 통치자들의 안락을 위한 장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수용하게 됩니다.
'민심'이란 단어는 도덕적인 감정에 어긋났을 때 돌아선다. 그가 대다수 시민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은 이태원 참사를 대응하던 모습, 즉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였다. 이를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비유했다. 이태원참사, 채수근 해병사건, 일본의 사도 광산을 대하는 모습에서 시민들은 최소한의 도덕 감정이 훼손되었다고 느꼈다.
'도덕감정론'은 도덕적 규범에 대해 묻거나 다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도덕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아픔을 대할 때 자기도 모르게 즉각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공감하거나 아픔을 느낀다. 윤석열 정부는 국가의 결정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도덕감각이 권력감각에 의해 크게 훼손된 것이다. 한마디로 무감각했고 불통 상태였다.
공개되고 있는 내란재판을 지켜보면 내란세력들은 아직도 반성 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빛의 혁명으로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선을 넘은 그들에게 무관용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면 재판을 연장해서라도 뿌리 뽑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불리는 '시대정신'은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계엄사태 이후 깨닫게 되었다. 시스템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하더라도 감시 없는 권력의 횡포는 재발할 수 있다는 것도 새삼 확인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빛의 혁명을 세계인들은 K- 민주주의라며 찬사를 보낸다. 민주주의 열망이 뿌리 깊게 박힌 민족이란 의미다. 우리는 권력을 남용한 대통령을 10년에 걸쳐 두 번이나 무력으로 평화롭게 탄핵시킨 현대역사의 산증인들이다. 자유를 저해하는 세력에 저항하는 유전자가 강한 민족인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는 권력의 움직임이 아니라 사건의 참여자로 행동하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역사가 쓰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비판적 사유를 기르려 애써야 하며 권력에 지속적인 감시의 촉각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국민주권시대를 연 정부가 이탈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